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16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내가 써놓고서도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독자를 위하는 글이기 이전에 나 스스로 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에 혼자 볼 기록에 그치더라도 일독을 마칠 때까지 읽고 생각한 바를 기록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책 내용(236쪽)이 묘하게도 직전 각오를 격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새 정보의 효용성과 그 힘을 절감하는 경험치가 많을수록 뇌에서 일처리를 하는 회로의 변경이 강력하게 진행된다. 예전에 사용되던 회로는 사용량이 줄어드는 대신 새로운 회로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에 따르면 우리 행동의 다수인 43%는 습관적 행동이라고 한다. 시골 농부님의 회로란 습관적 행동을 유발하는 뇌의 일부를 지칭하는 듯하다.
지속적으로 생각을 끊어 무념에 대한 경험치를 늘려줄수록 힘과 효과가 강해진다. 그리고 생각을 사용하는 습관이 바뀌게 된다.
생각을 끊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구독하는 <월간김어준>에서 들은 박문호 박사님 강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인간이 미래에 사는 비용이 바로 불안'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책 231쪽에 쓰인 부처(고타마)의 가르침과 그대로 대응한다.
고타마에게 생겨난 깨달음의 결과는 안심安心이다.
알듯 말듯한 문장이다. 더불어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진리는 묶이거나 거칠 것이 없으므로 활발발活潑潑한 것이다. 진리는 유지되어야 할 특정한 상태나 경지가 아니라, 모든 현상 전체이다.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은 물처럼 흐를 수 있다는 성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진리가 모든 현상 전체란 말은 너무나 마음에 드는데, 그 이면에는 '신'이나 '하나님'을 말하는 모순을 지적하여 사이다란 생각이 깔려 있는 듯도 하다. 그리고, '진리 탐구'란 말이 떠오르는데, 모든 현상 전체를 알 수 없을 듯한데 탐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관념이 바로 생각의 폐해인 듯도 하고, 이미 우리가 진리 안에 머물고 있다면... 일단, 논리적으로 묻고 따지는 대신에 우선 책을 다시 쫓기로 한다.
아래 문장은 진리가 활발발하다는 인식이 분명할 때 납득이 될 듯하다.
허무감과 우울감 때문에 의기소침해진다면 에너지가 여전히 망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래 내용을 읽을 즈음에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억울한 일을 아내가 토로하던 때였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이미 완전히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미 충분히 행복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문구를 떠올려서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 일이 있다. 별다른 행동 변화를 주지는 못했지만, 이 문구를 염두에 두니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바는 일부 실천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무례한 상대의 행동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판단(생각)을 앞세우기 이전에 아내의 억울함을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옳다>의 표현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주목을 하려고 생각을 억누르는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낸 듯하다.
자등명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아기 발걸음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해나 신뢰가 없어도 필요에 의해 습관화시키면 체득된다. 스스로 실천하고 검증하는 선순환의 힘으로 미망에서 깨어나는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자등명自燈明이다.
그리고 시골 농부님의 배움을 따라 하다가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바가 튀어나오는 오락가락도 괜찮아 보인다. 나는 어떤 체계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니까.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