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7
돌아보니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생각을 다스리기>편의 실행을 가능하게 했던 궁금증이 있었던 듯하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써보자.
하나는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대해 읽고 고민한 시간들이다. 책에서는 155쪽부터 설명이 나온다. 내가 밑줄 친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요? 변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멈출 수 없습니다. <중략> 동動과정靜은 절대로 서로 일여一如할 수 없습니다. 동정일여는 동과 정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동은 동으로, 정은 정으로 일여하다는 것입니다. 변화로 도달하지 않는 본래의 영구적인 정이 일여하므로 동이 온전히 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 이 두 세계에 걸쳐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말후구末後句입니다.
나는 저자가 설명하는 일여란 말의 느낌을 윤구병 선생님의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을 읽을 때 처음 배웠다. 마치 그 전에 모델링 공부할 때 구조적 관점(Structural View)이 동적이 관점(Behavioral View)이 서로 상호 검증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배웠을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이 나에게 一如이다.
그리고 말후구末後句란 말은 책을 읽을 때 뜻을 몰랐지만 사전을 찾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무시했던 말인데, 방금 구글링해서 뜻을 찾아보기 무시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굳이 쓸 일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말 뜻을 찾지도 않았는데, 내가 저 구절을 읽고 나서 언어의 표현력 한계를 명징하게 깨달은 순간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뒤어어 저에게 영향을 미친 책 내용이 167쪽에도 있었습니다.
어제의 나, 10년 전의 나에 대한 기억이란 현재의 세계를 설명하는 정보들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DNA에 대한 현대적인 설명마냥 우리의 기억이 그저 정보체일 뿐이라는 말이다. 나는 교양으로 드는 박문호 박사님류의 강의를 통해 이를 위한 배경 지식을 습득했다. 즉, 대강 동의한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체험한 이력이 이미 있다.
나의 정체성이나 생각의 일관성에 따라 차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애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혹은 연기과정으로 실행했더니 주말에 급격하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 연기 즉, 완전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몸으로 체험했으니 앞으로 이를 긍정하고 자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복잡한 일들이 많았던 지난 주간에 뜻밖의 페북 댓글을 받았다. 균형을 잡으려고 다시 말해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찐한 해체를 하라는 조언인가?
내가 대번에 떠올린 경험은 좌절이다. 살면서 수없이 좌절했겠지만 돌아보면 의미있다 기억하는 좌절이 4건 정도 있던 탓이다. 시골농부(김영식)님께서 다시 댓글을 주셨다. 해결이 아니라 놓아 보는 것.
평소 사전 찾아보면 의미를 곱씹지만 이 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리고 6일이 지난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문득 고민이 사라진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연기(緣起)를 내가 어찌할 수 없는데 거기 매달려 있는 일은 어리섞은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생긴다는 인연의 이치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불교 교리나 용어를 빌지 않고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한참 지난 후에도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는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벌어질 일에 대해 그걸 따지는 일은 우매한 일이다. (박문호박사님에 따르면) 언어를 통해 가상세계 만드는 인류는 예측을 못하면 불안에 시달리는 탓인데, 당장 행동해야 할 일에 대해 예측하자.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