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Aug 23. 2021

욕망의 근거와 가치의 세계

책과 대화하기 XXIV

최봉영선생님의 <본과 보기 문화이론> 99쪽의 욕망의 근거를 읽고 씁니다.


욕망의 근거는 몸과 마음

근래에 읽은 <데카르트의 오류>가 떠오르는 문구다. 부연하면, 몸과 분리한 이성따위는 없다는 배움이 떠오른다.

욕망의 근거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다. <중략> 몸은 구체적 감각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측면을, 마음은 느낌과 이해의 주체로 존재하는 정신적 측면을 가리킨다.

그것은 도올선생 노자강의 앞부분에서 계속해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3권의 책은 전혀 다른 동기로 읽었지만, 내 안에서 소화하려다 보니 섞이기 마련이다.


몸 차원 vs 마음 차원

최선생님의 글은 이원론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둘을 볼 수 있게 안내한다.

인간은 몸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생명체와 큰 차이가 없지만, 마음의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사피엔스의 특징을 '허구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설명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창세기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단군신화'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감의 시대> 저자 프란스 드 발은 유인원을 본 적이 없는 인간 문명에서 인간을 동물들과 분리하는 관념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유태계 기독교만이 인간을 동상으로 만들어 영혼이 있는 유일한 종으로 취급한다. 사막 유목민이 어떻게 이런 관점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에게는 거울을 비춰줄 동물이 없었기에 '우리는 혼자다'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능이 있는 생물이라 여겼다.

그리고, <공감의 시대>에서 공감을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징으로 설명한 부분이 연상되는 구절도 등장한다.

지각하는 마음은 개체단위로 수용한 감각적 자료에 근거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실행하는 까닭에 집단 차원에서 정보를 소통하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지각의 세계가 구체성을 지닌 이미지의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적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태에 능동적인 지각하는 마음

또 다시 데카르트의 오류 내용이 떠오르는 글이다.

인간은 근대로 접어들어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마음을 몸의 일부인 신경체계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인간이 자연과학적 방법을 좇아서 마음을 물질대사에 기초하고 있는 신경체계로 설명하자, 생각하는 마음에 근거하여 전개되는 정신활동의 독자성을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서 능동성(혹은 수동성)을 기준으로 몸과 마음을 나눈다.

감각하는 몸은 사태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반면에 지각하는 마음은 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구체적 기호 vs. 개별적 신호

비슷한 듯한 단어지만 전혀 다른 소통의 단위 두 가지를 제안한다. 구체적 기호와 개별적 신호가 그것이다.

지각하는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한 내용을 소통하는 것은 사태에서 얻은 '구체적 기호(concrete sign)'를 소통에 필요한 개별적 신호(signal)로 전환하여 이루어진다. 구체적 기호와 사태가 분리될 수 없는 까닭에 개별적 신호는 사태를 전체적으로 전달한다.

사태와 구체적 기호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면, 월말김어준에서 빅히스토리 강의에서 박문호 박사님 이야기가 생각난다. 책의 사태와 강의의 경험이 서로 대응한다.

고등동물은 고도로 발달된 지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중략> 한 예로 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바탕으로 거리, 깊이, 시간, 소리, 냄새, 맛 등을 종합적으로 처리하여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후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생각하는 마음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상징적 기호들(symbolic signs)'을 사용하여 지각하는 마음에서 얻어진 이미지의 덩어리를 부분으로 쪼개고, 그것들을 개별적 단위로 삼아 갖가지 질문들(sentences)을 구성하여 관계를 느끼고, 이해하고, 소통하고, 실천한다.


문장 놀이(언어 놀이)

최봉영선생님의 표현인 문장 놀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놀이의 대체어라고 한다. 문장 놀이라는 말은 어색했지만, 아래 구절은 윤구병선생님의 '있음과 없음'을 통해 인지한 내용에 상응한다. '있다'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없다'도 함께 인식(정의)되어야 한다는 점 말이다.

인간이 문장놀이로 의미를 소통하게 되면 '이것'과 '저것'이 절대적 의존관계에 놓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중략> 한가지 예로 '남자'라는 낱말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자'가 아닌 '여자'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절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문장놀이가치의 세계에 존재한다. 가치관도 불분명한 사람들이 가치를 말하는 혼란스러움이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인간은 문장놀이 속에서 모든 것이 절대적 의존관계에 놓이는 까닭에 시비, 진위, 선악, 미추 등으로 구성된 가치의 세계를 살아간다. <중략> 생각으로 돌리어 착하지 않은 것을 더욱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착하게 살기 위해서는 악한 것을 더욱 의식해야 하는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묻고 따지고 풀이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교육(?)에 중독되어 단어 뜻도 모르고 말을 하는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또 다시 인지한다. 도올선생이 노자강의에서 선악을 버리고 미추를 채용하라고 역설한 내용도 떠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다양한 함수의 정의와 표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