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12
<시골 농부의 깨달음 수업> 책에서 '깨달음은 사회의 것'이란 장을 읽으며 느낀 것을 쓴다.
내가 굳이 복음이란 단어를 단락 제목으로 쓴 이유는 좋은 소식을 전달한다는 복음을 굳이 기독교 교리에 갇혀 쓰기를 부정하려는 마음이다.
깨달은 자들이 언어를 사용하여 설법을 시작한 것은, 언어에 대한 실제 소유자인 사회를 향한 행위이다.
내가 브런치에 쓰는 모든 글은 그냥 쓰고 싶은 욕망에 따른 것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복음 전파 성격도 있다. 내가 배운 유익한 것을 소극적으로 사회와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일은 20년 이상 습관으로 고착화된 활동이다.
한편, '언어에 대한 실제 소유자인 사회'란 문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내 이해의 배경에 최봉영선생님이 계신 것을 깨닫는다. 아래 그림으로 압축할 수 있는 배움 과정에서 언어나 사회의 산물임을 알았다. (박문호 박사님을 통해 과학의 언어로도 같은 내용을 배우고 있다.)
나는 아래 문장을 읽은 직후 엄마와 대화 중에 써먹었다. 저녁을 함께 먹는 중이었으니 딱 써먹기 좋았다.
자기 돈으로 밥을 사 먹는 일도 대중의 도움이 없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내가 한 숟갈 뜬 이 음식도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자연의 인과관계의 결과물로 주어진 것이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성과를 내 몫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인식에 대해 엄마랑 내가 공감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듯 말듯한 문장을 하나 더 인용한다.
경지를 구하는 개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갑자기 안도감이 생겨난다. 2014년 결심하고 다음 해에 결행한 일(컨설팅 회사 그만두고 백수가 되는 일)은 어쩌면 경지를 구하려던 내 욕망을 내려놓은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한 일이 아니고 열심히 살다가 당시 결심하고 실행한 일이라 (고마움과 뒤섞인) 안도감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나는 사례명이 있는 천주교도이며, 아주 어린 시절에는 (강제로) 개신교도였다.
함께 사는 타인을 배려하라는 가르침이다. <중략> 자신의 깨달음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2015년 백수가 된 이후에 아주 우연하게 명리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는데, 내가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는데 명리학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운명의 틀이 있다는 믿음과 기독교가 말하는 은총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대변하는 교리를 향한 순종을 강요하는 어릴 적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는 위선이 적었다. 그리고 북경에서 열심히 성당 생활을 하면서 나는 다윗을 통해 성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또 대부님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성경은 나를 도올 선생의 영상으로 이끌었고, 도올 선생의 영상에서 배운 바들이 다시 이 책, <시골 농부의 깨달음 수업> 을 읽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