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21
인용한 글을 다시 읽어보니 20대에 읽었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느꼈던 거부감이 생각난다.
삶을 살아가면서 저항을 받게 되면, 그러한 저항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중략> 저항의 본질은 '나'라는 착시에 있는데 이 착시를 해결하지 않고, '나'를 보강하는 방법을 추구한다면 '슈퍼 나'를 만들어 착시를 강화할 뿐이다.
나는 사명서를 쓰고, 치열하게 이를 지키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나약한 나의 의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 뻔하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부정적 정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에 우연히 <김상욱 교수와 도올 선생님의 강의 배틀>을 본 적이 있다. 당시 김상욱 교수의 강의 이후에 도올 선생이 마치 부드럽게 훈계하는 듯이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도올 선생의 다른 영상에서도 서양의 폭주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셨는데, 시골 농부님의 글이 그런 기억들을 소환한다.
2014년 말의 실패 인정과 결단이 없었더라면 '슈퍼 나'를 추종하는 모습으로 더 살았을 수 있다. 2016년부터 나를 만난 가까운 지인은 나에게 성찰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성찰'이란 단어는 내게는 생소한 느낌이었는데, 내가 직선적으로 사는 대신에 다시 나로 수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그리 보이는 듯하다.
시골 농부님의 정교한 사례 설명이 이어진다.
눈치 빠르게 몽땅 갖다 버릴 생각이 든다면 멈춰야 한다. 그런 행위 역시 무소유를 득템하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니.
특별한 방법을 쫓는 일을 나는 '파랑새 쫓기'라고 부르는데, 그런 마음은 대부분 현실 도피 방법으로 교묘하게 무의식이 고안하는 듯하다.
수행이 망상이라는 모순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수행이 변화해보겠다고 조작하는 놈의 의지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필수 불가결한
처음에는 그 의지와 실천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다가 습관으로 정착시키면 된다.
그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서 저절로 일어나버립니다.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우리 행동의 43% 정도는 습관적 행동을 한다는 논문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그저 이 상황을 버티는 것이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이 버팀을 통하여 바둥거리던 조작심의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야,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려지게 되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치켜봐 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견성, 돈오, 깨달음은 내가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 온 세상을 덮치는 현상입니다. 여기에는 주재하는 놈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표현은 목사님들 표현인 '하나님과의 일치'하는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다시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무아를 간단히 말하자면 '나'가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체성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완벽한 실체성이 스스로를 허구로 간파한다는 것은, 실체성의 화려함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아이템을 장착하는 것일 뿐이다.
기존의 인식 회로를 바꾸어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회로와 무관하게 세상을 달리 인식하는 새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 분명하지 않다. 실천이 진행된 후에 다시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점수(漸修)라는 개념은 XP를 통해 나에게 익숙한 행동양식이란 점이다. 이런 부분들이 용기를 준다. :)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소통하며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 <꿈은 동사로 가득하다>를 들으면 뇌과학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낮에도 꿈을 꾸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감각기관의 안내를 반영한 꿈을 꾸는 것이다. 시골 농부님 표현으로 가상 현실 세계라는 표현의 의미일 수 있다.
가상 세계의 현실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각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인간은 현실 세계가 관념으로 해석된 가상현실 세계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게 되니, 이 인류의 집단의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중략> 수십억 년의 결과물인 몸과 수천 년의 결과물인 생각은 서로 괴리를 만들어 냄으로 현생 인류의 삶은 고통스럽다.
나는 아이와 공룡이나 그리스 신화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십억 년의 결과물인 몸'이 아니라) '수십억 년의 결과물인 지구'와 수천 년의 결과물인 책 사이의 괴리를 자주 확인한 바 있다. 이런 경험은 위 문장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이 아이가 가상현실 세계로 입장하여 그 사회에서 한 구성원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나'라는 주체 관념을 제일 먼저 세워야 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최봉영 선생님의 '행위자 이론'이 떠올랐다. 바로 온인 나와 쪽인 나의 대별이다.
최 선생님의 사상과 시골 농부님의 사상이 충돌하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고 기능으로써의 주체일 뿐이지 삶을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책임자, 주재자로서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 선생님의 행위자 이론은 말을 기초로 하고 있어 자연 지능이 아닌 사고 기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생각 걷어차기는 사고 지능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고, 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은 사고 지능 활용에 대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뇌는 이미 분비된 세로토닌의 영향을 활용하여 뇌에 가소성을 증가시켜 새로운 신경 회로('무아와 연기')를 건설한다. <중략> 모든 일들이 환경의 연기에 의하여 저절로 생멸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눈치채게 된 것이다. <중략> 삶 또는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모든 수행은 공통적으로 생각의 바깥을 체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
17.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