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20
아래 글을 인용하고 다시 읽어 보았다.
'사고지능'은 전두엽에서 처리되는 사고 시스템이고, '자연지능'은 저절로 그러하게 되는 질시이며 연기緣起다.
점차 익숙해지고 있지만 아직은 확실히 와닿지는 않는 말인 연기(緣起)의 뜻도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생긴다는 인연의 이치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다시 뜻을 찾아보니 연기란 '굳이 다 알려고 하지 마'라는 외침처럼 느껴진다.
나는 잦은 빈도로 이런 일을 경험해 온 듯하다.
저절로 그러한 실상의 이치가 '나'의 '사고지능' 속으로 균형 있게 포섭되는 것이다.
다만, 방법을 모르고 확신도 없다.
제목에 인용한 질문에서 이어지는 듯한 문장이다.
무아는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주객 분리가 사라진 상태이므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주의 상을 그려보려고 해도 안되던 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나'를 유지하는 망상의 구심력이 해체될 때 발생하는 무중력 상태의 압도적인 안도감이다. 이전에도 다룬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 글을 다시 검색하다가 다른 관점에서 같은 효용성을 시도하는 책 <스틸니스> 독후감을 발견했다.
여기까지의 느낌을 종합하고 내가 일상에서 떠올리기 쉬운 방법을 찾았더니 <감정을 바라보고 생각을 환기하기> 편을 다시 찾게 되었다. 정혜신 님에 따르면 감정은 나를 '나'에서 리얼월드로 데려간다.
내 감정은 나를 리얼월드로 데려간다. 나를 순정하게 만나게 해주는 곳이 리얼월드다. <중략> 절름발이 같은 도구적 삶에서 벗어나 드디어 '나'와 만난다. 삶의 축복이다. 이 과정의 심리적 발판이 무력감과 우울이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도움판으로 해서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에서 다시 '나'로 나아가기도 쉽다. 바로 불안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뇌과학 입장에서 불안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는 대가이다. '나'로 빠져들어갈 때 어떻게 나올 것인가?
시골 농부님이 스틸 사진이라는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한 글이 떠오른다.
그렇게 멀리 떠나버린 초점을 지금 여기로 끌어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토리보다는 시간이 배제된 스틸 사진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펼쳐져지는 스토리의 전개를 끊으면 지금 여기의 스틸 사진이 바로 드러납니다. 지금 여기는 단 한 장의 스틸 사진이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많은 스틸 사진들의 뭉치입니다. 지금 여기는 조악하게 빚어진 스토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에너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에 밑줄 친 문장은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 편을 떠올린다.
'내'가 이 공존 상태를 '이해'하게 되는 현상이다. <중략> 체득體得이라고 표현되지만 체현體現이라고 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왜냐하면 후자는 능동 상태가 아니라 수동 상태이기 때문이다.
박문호 박사님이 과거 강의 중에 '이해는 그렇게 그냥 따라와요'라고 말한 부분이 생각난다.
미신적인 종교들의 초월 지향에 대항하는 사이다 같은 설명이다. :)
깨달은 사람은 '나'를 초월하거나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나'로 계속 살아간다. 바뀐 것은 '생각'뿐이다.
<월말김어준> 초기 과학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 배경지식이 되고 있다.
물질의 최소 단위가 입자인지 파동인지조차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생각'에게 존재론적 판단을 할 자격이나 능력은 없다.
요즘 주변에서 실행력을 강조하는 배경이 이런 이해를 사회가 공유해서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생각'의 부재란, 주객 분리가 무너져 객체에 대한 주체의 사념적인 인식 행위가 사라진 것이다.
요즘 내가 자주 쓰는 말인 '과다 기획'이 떠오른다.
그리스 신화에 푹 빠진 아이에게 '신은 없다'는 말을 자주 해서 우리 아이들은 빈번하게 '신은 없지'라고 말한다.
계획하고 운영하는 별도의 주체가 없다.
그러던 아이들이 종종 그럼 '하느님은 뭐야?'라고 물으면 '세상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이치'를 그렇게 부른다고 답하곤 했다.
삶의 모든 과정은 '나'의 개입 없이 인과에 의하여 저절로 전개되고 있다. 사고 시스템의 부산물인 '나'가 주재자라고 착각할 뿐이며 그런 오해와 고집이 바로 망상이다.
2016부터 이어져온 내 삶의 여정에서 위 문장의 이치를 배운 듯하다. 그 전에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2016년 나는 이 상태에 도달하는 일을 '겸손'이라고 불렀다.
'자연지능'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앎의 대상에 대한 정보는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함'이 되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중략> '생각'은 삶의 보조 도구로 물러나며
어제 대화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겸손'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의 개입에 대한 오래된 습관이 만든 조바심을 어제는 극복하지 못했다. 오늘은 해보자. :)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
17.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