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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an 13. 2022

마음을 움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의 고요

일상에 고요를 구현하기 3

타이거 우즈가 파멸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타이거 우즈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저자는 한때 드러나지 않더라도 영혼의 고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타이거 우즈의 비극을 공개한다.

노련한 선장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이야기하겠지만 바닷물의 표면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문제는 그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이다. <중략> 가수 브루스 스플링스턴의 노래 <헝그리 하트 Hungry Heart> 속의 "모두 굶주린 마음이 있어"라는 노랫말은 사실이다. 중요한 건 그 마음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어떤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어려움에 처할지, 우리가 배부르게 될지 우리가 정말로 고요해질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절제의 필요성을 말한다.

결국 언젠가는 이만하면 됐다는, 충분하다는 그 말을 뱉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것이다. <중략> 결코 '충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과 끝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다가는 결국 파산에 이른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뒤이어 고요의 원천을 말한다. 주말에는 육아를 하다 보니 아이가 잠자리  시간이나 밥을 먹는 일로 놀이가 방해될  보이는 반응이 떠오른다. 보이는 것으로는 그렇고, 기억 속에서는 젊은 시절 폭주하고 싶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고요의 원천이 의도한 멈춤일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로 하여금 패배를 견디고 승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고요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혼의 고요가 필요한 이유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사적인 생활에서 우리가 화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라면 일터에서 이성적인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회생활과 사생활이라는 두 영역을 얼마나 오랫동안 따로 떼어놓을 수 있을까? 도시나 대제국을 통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게 헛수고일 뿐이다.

일중독이던 때, 가정을 돌보지 않던 선배들이 생각났다. 하마터면 나 역시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 문제가 영혼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당시는 인지하지 못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행동의 기본 원칙

당장 나에게 필요한 팁이 등장한다.

반려자에게 꺼내기 힘든 말을 하기 전에는 "인내와 상냥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부터 써먹어야겠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건 주어진 생을 선하게 살지 악하게 살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부여됐다는 의미다

 글은 최근에 있던 일련의 일들을 떠오르게 한다. 먼저 아이에게 선악이 절대적인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란 점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던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결정하는가? 아이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있다.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양심’인데 최봉영 선생님 에서  문장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말이 나에게 ‘~라’고 말하게 하는 것을 양심(良心)이라고 일컫는다. 사람들이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말이 나에게 ‘~라’고 말하게 하는 본디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말이 나에게 “그것은 내가 한 일이다”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와 같이 말하게 하는 본디의 말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은 ‘그위(公)’의 것으로서 말에서 비롯하는 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듣는 양심에 대한 정의다. 이에 따르면 선조들이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있다. 또한, 말한 대로 산다면 자유의지를 제대로 구현하는 삶이라  수도 있겠다.


내면 아이와 마주쳤을 때 해야 하는 일

아래 문구는 근자의  삶과 인연이 .

절대적인 보호자를 원하는 끝없는 욕망

2015  아이를 얻고, 2016 회사를 설립하면서 직원을 상대하는 낮의 경험과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저녁의 경험에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더불어  시기에 3 이상 매일 일터에서 얼굴을 뵙던 분이 내면 아이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또한 아내가 육아에 서툰 나에게 생후 36개월까지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심안으로 보게  모습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은 내면 아이를 다스리지 하여 소모적인 일에 시간과 노력을 쓰는 모습이다.


아래 표현을 읽을 때도 최근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수년간 외면해왔던 고통과 분노가 결국 폭발했고

근자에 가까운 대표님이 한 직원에 대한 불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때, 나는 그분에게 해당 직원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귀띔해주시라고 조언했다. 그게 쌓이면 상대가 전혀 짐작하지 못할 때 폭발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우리 모두는 어릴 때 상처받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도 그 같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보호하겠다고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중략> 거의 원시적이라고 할 만큼 깊은 곳에 존재하는 감정으로 유아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략> 상처받기 쉽고 두려움이 많은 아이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인생이 덜 무섭고 편안해지지 않겠는가? <중략>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공감, 진정한 자기 사랑이 필요하다.

분노를 느낄 때, 고요를 만들려면 인내공감, 진정한 자기 사랑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네!


욕망에서 비롯된 충동은 진정한 만족에 닿지 않는다

욕망에 대해 익숙한 부정적 해석을 전제하는 내용이다. 욕망을 내 행동의 동기로 바라보기 시작한 나에게는 마음을 열고 읽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욕망은 비합리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그 감정을 분석하려면 고요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중략> 충동을 느끼고 충동에 저항하고, 가만히 앉아 충동을 들여다보고 충동을 흘려보내기. 이렇게 하면 우리는 정신력을 기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며 나는 욕망을 양심에 빗대어 보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요일 듯하다.


충분하다(Enough): 불안을 잠재우는 키워드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인생의 모든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토록 바라던 대로 모든 제도와 여론에 즉각적인 변화를 이뤄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과연 나 자신에게 엄청난 즐거움과 행복이 찾아올까?

충분하다 느끼는 우리의 판단이 객관성이나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우리가 가진 덕이 내리는 저주이기도 하다. 더 나 아기고 싶은 열망 없이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잠재적 영역을 탐구하려는 성향 없이는 누구도 깨달음을 얻거나 탁월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더 발전해야 한다는 달성 욕구가 오히려 적이 되어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도록 방해한 셈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우리가 초조함을 느끼는 까닭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행복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복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두르고 업무를 우선한다. 그건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미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실감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아들과 있을 때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 순간을 반성한다.

당신에게 맞는 곳에서 일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부를 이룬다는 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건강을 지키고 고요를 찾으면서 동시에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창업 6년 만에 깨달은 내용이다.

어느 누구에게 감동을 주려고 했던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그 순간에 집중했을 뿐이다. 그들의 동기는 순수했고 불안이 없었으며 근심도 없었다.

일상에 고요를 구현하기

1.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정신의 고요

2. 무엇보다, 고요하게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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