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고요를 구현하기 4
이 장은 세례를 받았으나 종교가 나에게 꼭 필요한지 의문을 품고 있는 나에게 의미가 큰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고집스러운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깊은 영혼의 차원에서 내려놓는 것뿐이다. 중독은 의심할 여지없는 생물학적 질환이지만 조금 더 실제적인 의미로 보면 스스로의 충동을 우선하는 자아에 집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앞서 욕망을 양심에 비춰보는 일로 욕망의 충동성이나 파괴적 본성에 대응해야 한다고 쓴 일이 있다. 제 행동이나 가까운 사람 행동에서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면 중독이나 자아에 대한 집착과 연결해볼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내려놓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더 나아진다고 믿어야 한다. 결국 나는 더 큰 존재를 믿는다. 자연(의 막강함과 신묘함)을 믿고, 운명(벌어진 일에 대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도 믿는다. 다만, 그게 사람과 유사한 존재로 묘사하는 신이라고 주장하고 사소한 차이로 분열을 초래하는 개신교인들의 집단 행동에 대해 환멸인 듯하다.
더 높은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정복하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으므로 고요와 평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으며 노예 생활 또는 망명 생활을 결딜 수 있었다.
더 큰 존재가 작용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집단적 자아로 전쟁도 만들어온 기독교나 유사 종교의 역사를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서든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에 공허와 냉소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지인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이미 걸을 때, 바닥이 굳건하게 버텨서 지지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지 않느냐는 예를 들었다. 결국 스스로의 믿음 자체를 인지 못하거나 불신하는 일이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쨌든 무언가 믿고 산다.
삶의 끝없는 복잡함과 역경, 삶과 죽음에 대한 잠재적 공허를 오로지 자기 자신의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처사다.
나는 (취미로) 과학을 공부할수록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배운다.
우리의 지성과 직접적인 관찰 경험만을 절대적인 판단 근거로 삼지 말고 우리 너머 더 큰 존재를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타인과 가까워지고 서로 이어진다는 건 우리 영혼의 모든 면을 시험하는 일이다. <중략>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는 도덕적이고 충실하고 현재에 집중하며 공감하고 관대하고 개방적이 되겠다는, 더 큰 전체의 일부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으려면 진정한 의미의 항복을 해야 한다.
관계 맺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이다. 그리고 지금도 더듬더듬 노력하는 단계라 무거운 마음으로 읽은 내용이다.
넘치는 재물에 둘러싸여 인생의 온갖 풍요를 누리지만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는 삶을 바라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2000년 전 키케로가 던진 질문이다.
서로 솔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낫다.
어쩌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이유일 듯한 문장이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위대한 교육가라고 칭했다. 우리는 사랑을 줄 때 배우고 사랑을 받을 때 배운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고요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사랑을 주고받는 순간에 나는 매우 둔감했다. 반성을 하고 이제라도 느리게 나에게 맞는 속도로 익히고 살아야겠다.
함께함에 담긴 고요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아직 익숙하지 못한 감각이다.
혼자 있으면 우리가 될 수 있는 온전한 것은 한 조각일 뿐이다.
너무나 멋진 소제목이라 주말 육아 중에 아들에게 써먹었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 지구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라는 것, 그리고 이 하나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사실이라는 깨달음을 말이다.
기독교에서 이를 아가페 Agape라 한다는데, 이 표현보다 기억하기에 더 좋은 문구는 아래 내용이다.
마침 지난 몇 주간 내가 가장 많이 쳐다본 글이다.
우리의 소란한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기심과 자기도취를 버리게 된다.
'소란한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이라는 표현을 다시 보게 된다. 이기심과 자기도취는 소란한 삶에서 길러지는 것일까? SNS와 대중의 수다가 키우는 것이 그것일까? 페이스북이 나를 자극하는 장면을 보면 확실히 그런 듯도 하다.
전 인류를 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독창적인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손이 그토록 잘하는 일을 굳이 눈이 나서서 할 필요는 없다.
존 케이지를 인용한 문장을 보며 내가 떠올린 것은 개취 인정을 배우던 순간들의 고통이었다. 내가 개취 인정을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위임을 할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밑줄 친 문장은 읽는 순간 그 감동을 남겨두고 싶어서 지하철에서 페이스북에 옮긴 내용을 공유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물들과 DNA 대부분을 공유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땅을 걸으며 같은 바다에서 헤엄친다. 우리 모두는 운명처럼 떼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특정 국가가 세계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직도 중공이나 멸공 같은 표현을 부끄러움 없이 쓰는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말이다.
평화는 사람들이 선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며, 다른 생명체를 잘 대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잘 대우하는 일임을 깨닫게 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유도할 때 이루어진다.
위 문장을 보고 바로 사두었던 <어린 왕자>를 펼쳤다. 언젠가 우리 아들과 내가 같은 책으로 공감할 날을 그리며 기대를 간직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아직 <어린 왕자>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유용하게 느껴지다니.
눈으로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을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은 마음과 영혼으로 해야 한다.
글과 말의 중요성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활동적으로 바쁘게 지내면서도 여전히 고요할 수 있다. 사실 고요에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반드시 활동적이어야 한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겪은 환경 변화가 나에게 저자가 말하는 삶의 형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