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자일을 습관으로 4
후배에게 나의 애자일에 대해 설명했으나 그래도 자신이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잘 모른다기에 간단한 실천법을 알려주고 4개월만 정성을 다해보라고 했다. 그 실천법이란 것은 후배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져도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조직 상황에 맞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여서 아기발걸음 원칙에 따라 어떻게 시작하고 운영할지 그의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정성'이란 말을 덧붙인 이유는 한 번에 잘 되지 않는 탓이다. 능숙한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혼자 자기 자리에 가면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정성' 이란 말을 뱉는 순간 떠오른 영화 역린의 중용 영상을 보여주었다.
다시 봐도 감동적인 장면인데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구절을 볼 때는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공교롭게 후배와 그런 대화를 나눈 후에 곧바로 페이스북에서 김영민 교수님의 글을 봤는데 바로 아래 달린 페친님 댓글과 함께 너무나 공감을 하면서도 동시에 앞서 대화를 자극하는 울림이 있었다.
교수님 컬럼을 읽기에 앞서 정성과 귀찮음으로 이분법의 구도를 만든 후 생각을 헤아려 본다. '귀찮음이 기본이다'라는 말은 100%는 아니라도 하루 대부분의 시간에 대해 참인듯 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몰입을 하는 시간들을 빼고는 대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럼 정성은? 뭐든 한 방향으로 꾸준히 운전하듯 나아가는 태도를 나는 정성이란 말에 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완전히 대비되는 이분법은 아닌 듯하다. 생각이 술술 풀리지 않아 문장놀이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이 멈췄다.
며칠인가 지난 후에 문득 책꽂이에 있는 <초집중> 책이 보였다. 연초에 동료들과 함께 읽은 책이다. 가만히 책 표지를 훑어 봤다. Indistractable? (앞서 책을 읽을 때는 원서 제목도 안 본 모양이다.) 집중력을 지배하고 원하는 인생을 사는 비결이란 부제를 읽는데, ‘집중력을 지배하는’ 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Instractable 이다.
삶은 현재(present)에 내가 무얼하느냐로 구성된다.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도 바로 지금 내 몸일 뿐이다. 맞아 그런 내용이었지. 책을 뒤짚어 보았다. 다 읽은 책인데, 뒷면 글은 읽지 않은 모양이다. 책 뒷면의 내용도 처음 보는 문구지만, 이미 느끼고 있던 일을 설명한 듯 공감했다.
두 종류의 사람이라! 요즘 내가 자주 써먹는 비유법인데... 책 뒷면의 문구는 상당한 울림을 주었지만, 정작 내가 그 울림을 상기하여 문장놀이로 풀어내는 데에는 또 다른 인연이 필요했다.
작년에 독서 모임에서 만났지만 단 둘이 대화를 하지 못해 아쉬운 분이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할 듯 했는데, 코로나 상황으로 그런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가 일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드디어 지난 주에 만났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데, 그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신호에 반응하며 산다고 말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은 아닌데, 뇌과학 공부 중에 믿게된 이론이라고 했다.
꽤 호감이 가는 말이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으며 내 생각을 더하면 신호는 두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나는 자연적인 신호로 내면의 울림이나 세미한 소리 가운데에 내가 감지하는 어떤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인 신호로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나 다양한 매체가 그것이라고. 나는 전자에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이는 소수고, 대부분 후자에 반응하며 TV 대신 들고 다니는 휴대폰을 쓰는 시대인 탓에 후자에 대한 반응을 가속화 되는 현실을 풀어놓았다. 우리는 상당한 교감 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 대화에서 깨달음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지난 주 목요일 화상 미팅으로 진행한 독서 모임에서 또 다른 후배가 쓴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자연적인 신호 혹은 내면의 신호 등을 감지하는 일이 깨달음이란 생각에 휩싸였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초집중 책 뒷면에서 저자가 말한 초집중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자유로움을 추구했다고 믿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초집중자 훈련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을 몰랐을 뿐.
그러던 중에 놀라운 메모를 발견했다. 잘 모르는 페친님이 쓰신 글을 캡춰해었는데, 제랄드 와이버그가 말하는 돌줍기 정도로 '어딘가 써먹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저 공감했을 뿐, 내 의도가 매우 모호한 메모였다. 놀랍게도 이 글을 쓰는 순간 우연히 그 메모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물었다. 간절함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간절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구는 바로 <연금술사> 뒷표지에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은 내가 선배가 없이 이 길을 걸어갈 때 위로해준 최고의 말이었으니까. (참고로, 여러분도 간절함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떠올려 보시고, 구글 이미지 검색을 훑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귀찮음을 뚫고 스스로 바라는 어딘가로 나아가는 데에는 간절함이 필요할 수 있겠다. 그 간절함을 몸에 배도록 하려면 정성이 필요하다. 사람을 칭하는 한자어에는 이미 사이 간(间)자가 들어있을 정도로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만을 고려해서 정성을 들인다고 나를 온전히 통제할 수도 없다. 수많은 인터럽트 혹은 신호가 나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오래 전에 다 읽은) 초집중이란 책도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왔다.
즉흥적으로 쓴 글이고, 내 삶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우연한 사건을 종합하여 하나의 주제로 향했으나 주제가 뚜렷하지 않다. 전문 작가도 아닌데, 무리하게 시간을 쓸 생각은 없다. 그래서, 이 정도면 하고픈 말은 대략 했는데, 잔상으로 남은 두 개의 글귀가 있다. 그 글을 쓴 이들에게 보내는 답으로 글을 마친다.
하나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나에게 노출된 앞서 언급한 후배의 페북 문구다. 그에게 이글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한데, 보물찾기 하듯 구글 이미지 검색을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두번째는 나에게 보내온 메일 문구이다.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행동의 변화는 어떤게 있을까요?
또 그 작은행동은 어떤 연유로 안좋은 상황을 극복하는 마중물이 될까요?
내가 그의 질문에 속시원한 답을 하긴 어렵다. 다만, 이 글이 그에게도 하나의 울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제목을 귀찮음 對 정성으로 썼다가 목록에서 보니 영 어색해서, 다시 귀찮음 vs 정성으로 바꿉니다. 이건 저만의 편향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