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넘어서기 3
후배에게 애자일/린 설명을 시도한 일이 있다. 말을 뱉고 나면 다양한 형태로 피드백이 생긴다. 내 행동을 돌아보게 되고, 감정이 남기도 하고, 또 상대방 반응이 잔상으로 남기도 하고, 대화 과정에서 과거에 다른 맥락으로 보관해두었던 기억과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모아 3년 7개월만에 나의 애자일에 대해 기록해보자.
사실 브런치를 열기 전에 짧막하게 페이스북에 쓰고 말려고 했다. 그랬다가 이참에 한번 정리해두자 마음 먹었다.
2009년 코엑스 행사에서 발표했던 발표자료가 인터넷에 없어 아쉽다. 장표 초반에 삽입했던 4계절을 나타내는 그림이 보고 싶었는데...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보면, 2008년 PM을 맡을 당시 나는 그야말로 애자일 선언 추종자였다. 반드시 우리 프로젝트에는 애자일을 도입한다는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목표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PM이었다. 하지만, 타이슨이 말했듯이 실전에서 한대 맞으면 허망한 계획이 아닌 진짜 목표를 갖게 된다.
당시 나는 인간을 대하는 기술이 너무 없어 PM을 하면서 말 그대로 내면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때 잘한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애자일이란 키워드에 대해 1년이 지난 후 내가 갖은 느낌은 1년 전과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를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발표할 때, 반복을 강조한 부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계절의 반복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자료도 없어 기억을 복원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 저의 다른 발표를 보시고 기록해주신 분이 있어 일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얼마전에 호주로 여행을 갔다오셨는데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을 했음에도 여행을 가기전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중략> 애자일 방법론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개선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완전히 서로 다른 체계간의 만나기 때문에 모든 일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자일을 적용하려고 해도 보통 고객은 정형화된 WBS를 원하고 개발자들은 WBS를 가지고 어떻게 애자일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과 협의해서 적절한 선의 마일드스톤을 정하고 그 안에서 백로그를 작성하여 이터레이션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서로간의 인정에서 출발해야 하며 상대에게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중요한것은 끈질기게 버티는 것입니다.
제 발표에 대한 기록에 단서가 있다. 힘들었다는 투정을 한 듯 한데, 그 뒤에 점진적 개선이 서로 다른 체계(주로 사람과 사람이 만든 결과의 조합)를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애자일 이해가 나온다. 계절의 반복이 이를 상징적으로 담으려고 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비약이 심했군. ㅡㅡ^)
당시 발표 기록을 보니 설명은 매우 서툴었지만, 정수가 전달된 흔적도 있다. 아래는 저의 발표 내용이 아니라 기록을 남긴 Outsider님이 배운 점을 쓰신 것이다.
점진적으로 개선한다는 것을 삶에까지 적용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나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번에는 어려워도 좀 익숙해 지면 삶을 많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2016년 이후 일터에서 저를 만난 많은 분들이 저의 트레이드 마크로 생각하는 아기발걸음에 해당하는 문구가 보인다. 2010년에는 아기발걸음이란 표현을 몰랐으니 해당 표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Outsider님 덕분에 내가 아기발걸음이란 말(필자는 XP책 2판에서 처음 봄)을 알기 이전에 이미 TDDBE 책을 통해 비슷한 방식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유명한 책인 켄트벡의 TDDBE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보폭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작은 보폭으로 반복을 한다는 부분이었는데 이 TDD를 삶에 적용하여 일을 할때 작은 단위로 나누어 일을 하고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하루이상 걸리는 작업은 무조건 나누도록 팀원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해지고 빠르게 갱신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때 막판에 가서 후회를 하게 된다면 주기를 빠르게 해서 매일 후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2016년 북경으로 향했다. 첫 번째 미션은 비전이 없는 개발업체를 클라우드 서비스 조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첫 해는 매우 지루한 밭갈기(?) 같은 날들이었다. 당시 중국회사 법인장님은 용기를 내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는 직원들에게 특별히 마음을 썼다. 그리고, 그 분은 죽어가는 식물을 가져다가 살려내는 일을 취미로 하셨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나는 농사나 식물 키우기에 전혀 경험이 없지만, 농부의 마음이란 것을 떠올렸다.
그 전까지 나는 컨설팅 회사를 다니며 약속한 기간 내에 결과를 내는 훈련을 했다. 15년 가까운 세월동안 스무개가 넘는 프로젝트에서 이를 하다보면 효율과 결과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던 내가 변화를 각자의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는 훈련과 학습을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행(?)을 하며 배운 것이 바로 그 농부의 마음이다. 특히 팀 효율을 저해하는 행동도 받아들여야 그 역시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사실을 배웠는데, 나는 그걸 한동안 개취 인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보니 이미 XP 넘어서기란 연재글 두 개가 있다. 나는 이제 애자일을 어느 때고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주관적인 판단이니 그 상태가 무어냐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을 할 때, 준비 기간을 최소로 하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Just Do It) 요령을 금새 찾는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점차 결과나 학습량을 늘려가며 운전하는 운영이 가능하다. 이를 아기발걸음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반복을 하며 변화를 수용하다 보면 방향과 비전이 모호해보이지만 의사소통을 통해 점진적으로 일치를 이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페이스북 글에 함께 묻따풀학당 활동을 하시는 페친께서 이런 댓글을 올려주셨다.
2014년까지 혼자서 XP를 익히던 내가 2015년부터 일상에 무리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주변 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XP를 전파했다. 지금 손으로 꼽는 몇몇 지인은 XP를 잘 익혀 쓰고 있다. 얼마전부터는 함께 XP를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나의 기준은 일상에 무리를 주지 않는 범위인데, 요즘은 시간 관리를 잘하면서 처리 능력이 늘어난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를 더 많은 사람에게 확산하고 전파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일단, 브런치에 이미 연재 중이던 XP 넘어서기는 1장부터 쭉 해보기로 마음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