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6
엄마가 A를 칭찬한 것은 <중략> B와 달리 엄마 말에 순종할 때였다. <중략> A도 자기 존재 자체로 엄마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은 적이 없기는 B와 마찬가지다.
아픈 지적이지만, '성실하게 행동해야 칭찬받는다'는 지배자에게 배운 권력을 얻는 법을 보호자가 필요한 나약한 아이에게,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게 향하는 비극인지도 모른다.
최근 커뮤니티 동료들과 함께 읽고 있는 <사피엔스> 한글판 서문의 내용이 떠오른다.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연신 '맞아. 맞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문제의식을 키운 것이기도 했다. <당신이 옳다>에서 실마리를 찾기로 하고 배우고 실천하자.
공감은 좋은 말 대잔치나 칭찬의 립서비스가 아니다. <중략> 전하는 말의 내용 자체가 따뜻한가 아닌가 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말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중략>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향하고...
잘못된 통념과 달리 공감은 존재 자체를 향하느냐가 핵심이란 설명이다.
딸 A에게 한 칭찬과 인정은 딸 A의 존재 자체에 내려앉는 말이 아니라 딸 A의 강박적인 행동과 성과 위에 집중한 엄마의 칭찬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개취인정을 훈련하던 시절 내 마음 상태가 '농부의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무더위 속에 힘겨운 일을 하던 농부 이미지는 내가 인내심을 갖고 기약 없는 개발자들의 성장을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곁을 지켜주는 이가 있었고, 나는 살면서 처음 인내심을 발휘해 그들의 싹이 발아하는 것을 기다렸다.
공감은 발아를 기다리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업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관계에서 업무적 노력이나 성과에 대한 언급은 그 관계에서 공감적 반응의 중심일 수도 있다.
내가 부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였던 공사 구분[1]과 달리 꼭 필요한 '공사 구분'에 대한 설명이다. 회사는 존재(개성)가 아니라 성과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2]
생활환경 탓인지 마흔이 되어서야 '갓 지은 밥'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중략>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나는 최근에 박종윤 님의 페북 글을 보고 자존감의 의미에 대해 매우 공감한 일이 있다.
때문에 저는 자존감의 사전적 의미에는 이견이 없으나, 자존감 상실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은 “자존감 自尊感” 이 아니라 “자존감 自存感”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마음 말이죠.
중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던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 이미지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너무나 신비스러웠는데, 공감의 힘을 구현하는 이미지가 이런 것일까?
그리고 학창 시절 수줍음 많고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나는 어떻게 자존감을 갖추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나에게는 운명처럼 찾아온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 시작은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으로 만난 전교조 선생님이었다. 학교와 정부의 탄압 속에서 '참교육'을 주장하셨던 선생님은 중학교 1학년도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존감을 키운 것은 아마 대학에 진학하고 푹 빠졌던 춤 그리고 사회 초년생 시절 개발 블로그를 열심히 쓸 때다. 나 스스로 언제고 시작할 수 있었고, 내가 만든 몸짓이나 글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뎌내고 동의하는 눈짓과 표현 등의 수많은 흔적을 흡수해서 부족한 자존감을 채웠음을 스무 해가 훨씬 지난 지금에 깨닫는다.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이 자존감을 채우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당장 바로 옆에 있는 사람[3]부터...
[1]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 회사 등의 조직에 희생을 강요할 때 '공사 구분'이라고 하던 현상
[2] 아이러니하게 많은 기업이 개인 단위로 성과 측정을 하지 않으면서 연말에 평가를 강요해서 개성(존재)을 평가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우를 범한다.
[3] 다행히 8살 큰 아이는 벌써 선생님에게 '자존감이 높다'는 평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