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Jan 15. 2023

그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되어라

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책의 80%를 읽었다. 좋아하는 동생이 (추천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는 말을 듣고 사서 읽어 보았다. 아마 도발적인 책 제목이 책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살 때 알게 된 사실은 저자인 박총 목사님과는 이미 페벗 관계였다는 점이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2020년에 책을 읽을 때 마음먹은 '사골 우리듯이 책을 읽자'라는 구호를 실천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그 관성으로 <욕쟁이 예수>도 읽고 기록을 남길 뻔했는데, 저자의 용기와 실천에 대해 약간의 예의를 더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독후감을 쓴다.


전에는 바로 밑줄 친 내용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엮어서 글을 썼다. 이번에는 저자에 대한 나름의 예의를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내가 기독교와 한국의 기독교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써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오해를 줄이고자 한다.


나와 기독교

나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때 알지 못하는 이유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엄마 아빠 모두 다니지 않는 교회를 왜 의무감에 다녔는지 모르겠다. 나는 예배 시간의 '경건하다'라고 배운 그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싫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르게 말할 듯한 분들이 교회에서는 차분한 말투를 구사하는 일도 위선적이라 느껴졌다. 학교에서 모범생인척 하는 또래들이 교회에서는 연애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전도사라 불리는 분들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다시 말해 권위주의 체제에서 지도자가 병사, 학생, 부하직원에게 하는 행동 양식을 그대로 했다. 차이가 있다면 지시하는 내용의 출처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의존하여 권위를 얻으려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외가에는 맹목적으로 유명 목사를 추종하는 분들이 많았다. 지금 돌아보면 외가 사람들은 유명 목사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완화된다고 믿은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교회를 그저 자기가 옳다는 권위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삼는 듯이 보였으나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에 대한 확신이 독선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중학교에 가면서 완전히 결별한 교회는 위선적이고 배타적인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장 먼저 내 발로 찾은 곳이 다시 교회였다. 나의 경험의 폭이 좁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학교에서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상대해 줄 사람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하지만, 교회에서도 배울 만한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금방 나는 혼자서 찾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22년이 흐른 후에 고객으로 만난 대부(천주교 표현)님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북경이라는 외국에서 한인성당을 다녔고, 3년 정도 전례위원이 되어서 열심히 종교 활동을 했다. 그때 나는 몇 가지를 분명히 배웠다. 성당도 사람 사는 곳이라 위선만 있는 곳도 아니며, 배울 점도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릴 때 교회와 달리 성당은 강권과 독선이 없었다.


나는 어떤 독자로 책을 펼쳤는가?

3년간 매주 전례에 참석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왔지만 나는 예수에 대한 관점이 없었다. 굳이 꼭 답하면, 나는 예수처럼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전부였다. 처음으로 예수에 대해 궁금해진 것은 도올선생 유튜브를 볼 때였다. 그래서 도올 선생이 소개한 <갈릴래아의 예수>를 읽었다.


<갈릴래아의 예수>에 소개된 예수는 내가 교회에서 듣던 예수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혁명가였다. 그리고 다시 <욕쟁이 예수>를 펼치는 이유도 교회가 알려주지 않던 혹은 교인들도 모르거나 교단이 감춰왔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을 듯하다.


나는 종교인으로 살고 있지 않지만, 신앙의 중요성은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꼭 성경의 틀 안에 갇혀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과거에 고미숙 선생님 강의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때 '문화 상대주의'라는 표현을 배웠다. 나는 종교를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읽어 보니 저자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비종교인으로도 상당히 배울 점이 있다. 그리고 통쾌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교인이 아니면서 통쾌함을 그대로 노출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황한 내 이야기를 쓰면서 앞으로 독후감을 쓰는 과정에서 무례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매력적인 서문

서문에 매력적인 구절이 등장한다.

<나와 너>로 유명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말했다. 종교처럼 신의 얼굴을 멋지게 가리는 것은 없다고. 가리기만 한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소비'하기 좋게 길들였다. <욕쟁이 예수>는 그런 우리에게 예수의 맨얼굴을 정직하게 직면하자고 도전한다.

예수를 '소비'하기 좋게 길들였다는 말은 도발적인 듯도 하고, 사실을 정교하게 표현한 듯도 하다. 독후감을 더 쓰기 전에 '크리스천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무엇인가'를 한 번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북경에 살던 시절 3년 남짓 열심히 성당에 나갔다. 세례를 받았고, 독서단장을 맡으며 전례활동까지 열심히 했으나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하지 않는다. 나에게 신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크리스천들이 따르는 형태를 굳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종교인에 틀 안에 두고 싶지 않다. 그리고, 현재 내 주변에 이미 애를 써야 할 공동체가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공동체를 추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라'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성서에 나오는 인물 예를 들면, '다윗'에 과몰입하기도 한다. 나는 성서 역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데 거리낌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크리스천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크리스천이 아닐 뿐이니까.


그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되어라

저자는 스팅Sting의 노랫말을 인용했다.

그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되어라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얼마 전에 읽은 손웅정 님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지? 의문이 생기면 다시 손웅정 님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삶은 의의로 단순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리고 집념이 필요하다. 집념을 드러내는 말은 다시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는다>는 이현세 님의 글을 인용해 보자.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나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때 주의할 사항은 다시 손웅정 님의 지침을 따르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면 불평하기 쉽다.

내 인생을 살면서 불평불만하고 하소연하지 말라.
네 삶이고, 네가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편집해서 보니 복음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경에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면 이런 즐거움도 가능하다. 지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어릴 적 교회에 다닐 때 내가 느낀 거부감 중에 하나는 교회는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점이었다.


맺음말

비종교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는데, 저자가 인용한 스팅의 노랫말이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는 배경일 수도 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신앙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이유도 같다. 세상은 내가 나로 사는 일을 방해한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고, 수단은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해야 한다. 종교든 말든...




작가의 이전글 반복해서 틀리는 맞춤법 오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