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읽고 행동 변화 만들기 2
지난 글과 비슷하게 2장 <물건은 왜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가?>를 기준으로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쓴다.
아래 문장을 만났을 때는 마치 일시정지를 경험한 듯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일을 모두 이루었다.
심취한 듯했지만, 한편으론 저자의 의도는 알듯 모를 듯했다. 저자는 연이어 익숙함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금세 그 상황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일은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당연한 일은 이내 싫증이 난다.
익숙함을 화제로 계속 이어나가기 전에 '원하는 일을 모두 이뤘다'는 말 뜻을 곱씹어 보았다. 공교롭게 페벗 박종윤 님이 인용한 만화가 이현세 님의 글을 보았다.
마지막에 박종윤 님이 붙인 태그는 바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정의 아닌가?
그렇다. 저자가 말하는 물건은 나에게는 '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방해물'이었다. (이 책에 끌림이 있을 때 나의 심리상태는) 그 관심을 아껴서 내가 바라는 나를 향해 한 걸음 가고 싶었던 것이다.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나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아기 발걸음'을 자주 소환한 이유도 '꾸역꾸역'을 소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1]
책의 소제목은 '우리는 왜 새로운 물건을 원하는가?'지만, 나에게 맞추면 '물건' 대신 '자극'이 어울린다. <초집중> 책의 저자도 새로운 자극을 촉발하는 마케팅 방식이 우리의 건강한 일상에 해로움을 끼친다고 지적했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인간의 신경 네트워크는 자극의 차이를 검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어떤 자극에서 다른 자극으로 변화할 때 발생하는 차이 자체를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자극이 없다면 가치가 떨어진다.
늘 그곳에 존재하는 물건은 자극의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익숙해지고 당연해져서 결국에는 그 물건에 싫증이 난다.
아래 문장은 또다시 '띵~'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차이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다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소환하자. 욕망의 임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줏대와 잣대'가 '차이'를 만드는 인식들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잊고 사는 혹은 모르는 듯한 중요한 사실을 일러준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내면의 자극뿐이다. 차이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옳고 그름보다는 상충관계로 보기> 말미에 다룬 '중도라는 허구'도 떠오른다. 자기 선호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객관을 주관으로 보는 일이 중도인가?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선택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서 '올바른 기준'을 따른다고 믿는 것일까?
저자는 안드레 애거시라는 중학교때 기억 속에 있던 이름을 소환한다. 그에 따르면 성취는 점일 뿐이다. 그 점에 비해 성취를 위한 긴 과정은 개념화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워 명료하게 다뤄지기 어렵다. 저자가 우승의 기쁨을 말한 이유는 사실 새로운 물건을 탐하는 일에 대해 자기 인식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아무리 많은 물건을 손에 넣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 아주 작은 일에서 느끼는 기쁨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낮에 길을 걷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빵을 먹을까 말까 하다가 먹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잡생각을 했는데, 먹으면서 '행복을 미루지 말자'는 거창한 생각까지 떠올라 혼자 웃었다. 그 일화가 떠오른다. 잦은 기쁨을 추구하고 위대한 꿈을 꾸자. :)
저자의 통찰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그는 인간이 미래의 감정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지금 좋아 보이는 것이 나중에도 좋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의 자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아래 문장에 답을 제시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원래 단기적인 판단에만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두려운 천적을 만났을 때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을 어떻게 몰아넣을까 등 아주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때 이 능력을 사용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인간의 뇌가 5만 년 전에 진화를 멈췄다는 저장의 주장이 떠오른다. 아무튼 뇌가 준비한 예측의 용도는 그 정도라 물건을 살 때 미래의 감정을 예측하지는 못한다.
물건을 손에 넣지 않은 현재에서는 그 물건을 손에 넣은 후 미래에 느낄 기분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물건을 갖게 되는 순간 느껴질 기쁨이 이후로도 지속되리라 믿는다.
어쩌면 과거 소유할 때 느꼈던 만족감이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 되었던 대부분은 실패한다.
그 물건을 가졌다는 건 조만간 익숙해졌다가 싫증이 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곧 다른 자극을 제공하는 새 물건이 갖고 싶어 진다.
실패의 정의가 모호하긴 한데, 구입 당시만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마침 아래 내용을 읽은 직후 물건들을 모시고 사느라 고생하는 가족들의 일면을 보고 말았다.
물건을 손에 넣기 전에는 그 물건에 질려버릴 미래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중략> 지금 우리가 소유한 물건의 상당 부분은 본래 기능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소유하고 관리하려면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든다.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위해 모두 필사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물건은 어느새 도구가 아닌 우리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가 아닌 사람에게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대적인 물건의 용도(?)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인간 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지면서 어느새 물건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내면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중략> 물건의 가치가 자신과 동등해지고 심지어는 자신의 주인이 되어버리는 현상에 대해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건은 당연히 내가 아니며 내 주인도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단지 도구일 뿐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는 것이 이런 현상을 막는 길이다.
저자는 이런 폐해에 빠지는 요인으로 인간 본연의 특성을 설명한다.
본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즉,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동물이다. <중략> 그런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인간은 무리에서 떨어지면 '고독 애플리케이션'이 가동된다. 사실 고독이란 감정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무리 안으로 돌아오세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라고 명령하는 경보장치와 같다.
지인 중에 어릴 때 외롭게 자라서 무작정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분석하는 분이 있는데, 위 내용을 알려드려야겠다.
우연한 순간 고독은 살며시 다가온다. 자신이 고독하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고독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중략>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방법 발고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없다.
2장 <물건은 왜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가?>에서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시작했다. 물건을 나도 모르게 모으고 지배(?)당하는 우리의 본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페벗님 공유로 알게 된 이현세 님의 글에 영향을 받아서 마무리는 내가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해 하루에 한 걸음 걷자는 구호로 끝을 낸다. 물건에 혹은 물거늘 만드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 대신에 내가 느끼는 내가 되기 위해서.
[1] 나는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대변하는 주제에 대해 알고자 했을 때 비록 책을 읽지 않았지만, 다른 자극과 시행착오로 책에서 설명하는 노하우 상당부분을 익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