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2
이 글은 지난 글인 <그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되어라>편에 이어 쓰는 <욕쟁이 예수> 독후감이다. 욕쟁이 예수 I, II로 구분된 2개의 장에서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글을 쓴다. 문구를 아우르는 교훈을 한 마디로 바꿔보려고 시도했다. 저자가 쓴 문구에서 어미만 변경하여 내가 받은 메시지를 제목으로 만들었다.
29쪽의 문구를 보자마자 3년간 성당을 다니면서 배운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웃 사랑'이었다. 나에게 첫 번째 이웃은 아내이고, 엄마고,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종교적인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통념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통상적인 ‘이웃’과 내가 여기는 ‘이웃’이 다름을 그러낸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책을 다시 읽고 몸에 익히는 이유가 나에게는 '이웃 사랑' 실천의 일환이다.
그런 점에서 노력을 하지만 아직 나에게 익숙지 않은 행동을 깨닫게 하는 구절이 있다.
부디 누가 욕을 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든 <중략> 정죄하는 대신 그 사람의 분노와 아픔을 읽었으면 한다. 욕을 거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감정을 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 헤아렸으면 한다.
한편, 스스로 나의 분노는 잘 어루만지고 다스렸구나 싶다. 대학교를 졸업할 시점 나에게 경고만 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분노가 끝내는 직업 세계에서 온전히 나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 분노로 인해 나는 거듭났다.
하지만, 공적 분노에 대해서는 콤플렉스가 있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일에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 부채로 남아있는 사건이 있다. 촛불집회 때 함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위축시킬 때가 있다.
맥락은 다르지만 어딘지 내 감정과 닮은 듯한 글이 있다.
김수영 시인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탄식했듯 "왜 나는 (커다란 불의에는 침묵하면서) 조그만 일에는 분개하는가." 그런 우리의 근시야적인 반응이 이 땅에 불의가 무성하게 번식하게 해 준 숙주임을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기독교인 하면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저자와 같은 훌륭한 목사님이 '이 땅에 불의가 무성하게 번식했다'라고 글로 써주셔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나는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불의가 공정의 옷을 입었는데 대중이 알지 못한다'는 현상이라고 믿는다.
육아를 하는 처지 때문인지 유독 눈이 가는 문구가 있다. 브루스 콕번의 기사인 듯하다.
아들아, 나중에 커서 진짜 분노해야 할 때는 화를 내고 진짜 욕을 해야 할 때는 욕을 하렴.
큰 아들이 나에게 '아빠는 이럴 때는 너무 천사 같은 때, 화낼 때는 정말 무서워.'라고 말을 해서 '띵~'하고 한 대 맞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말해줘서 무척 고마웠다. 아이가 나에게 스승이 되는 장면이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저 문구를 보며 다시 결심하는 바는 언제 그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줄 것인가 기준을 세워서 명심하는 일이다.
'분노'라는 현상을 가운데 두고 내 개성을 돌아본다. 내가 분노를 에너지로 잘 활용하는 주제나 상황이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밑줄 친 구절들 중에서 자신 있는 내용 다시 말해서 잃어도 부담이 되거나 뜨끔하지 않은 내용부터 추려본다.
근본주의자들은 평소 누구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가 기성 교회에서 요구하는 점잖음의 외피를 벗고 '신 앞에 솔직히' 서려고 하는 이들, 기존 교리에 불편한 의문을 제기하고 교회의 전통을 문제 삼는 이들이 나타나면 긍휼과 관용 한 점 없는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열이면 열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면 단호해야 한다며 자신의 호전성을 옹호한다.
내가 주로 쓰는 표현에 따르면 글을 읽자마자 '권위주의'자들에 대한 나의 혐오가 올라온다. 나는 '권위주의자'들 앞에서는 전사가 된다. 부모님들은 나에게 '신 앞에 솔직히'는 몰라도 '자신에게 솔직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쳤다.
아래 문장은 내가 교회를 비롯한 권위주의 공동체를 피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거룩하기만 한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않는 이른바 은혜 필터링이 강하게 작동하는 공동체라면 그곳은 이미 '은혜 파시즘'이 창궐한 상태이다. <중략> 자아의 진정한 색깔true color을 드러내도록 격려하기보다는 받아들여질 만한 색깔-일종의 보호색이다-을 덧입는 위장술에 능숙해지게 했다.
나는 아래 문장에서 '하나님'과 '심령', '주'라는 표현만 빼면 무슨 뜻인지 안다고 믿는다.[1]
하나님에게까지 말로 은혜를 끼치려 들 필요는 없다. '날 것 그대로의 심령'이야말로 주께서 반기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분노'를 가운데 두고 밑줄 친 글귀를 셋으로 나눌 때 회색 영역으로 보이는 문구들을 하나로 묶었더니 '비폭력 교류'라는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인상 깊게 읽었던 <비폭력 대화>에서 수식어를 차용했다.
아래 문장을 여러 차례 읽어 보았다.
수학 공식처럼 원칙적이기만 하다면 그거야말로 기계적 관계가 아닐까?
그랬더니 나에게 익숙한 직업적 경험이 떠올랐다. 내가 많은 사람을 도우면 만든 <성공적 대화를 돕는 그림>도 떠올랐다.
하나의 정답을 정하지 말고 대화할 수 있다면 '민주적' 소통이 가능하다. 직관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일 듯 하지만, 그들의 주요 이해관계자라면 도리어 지름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직업 공간을 벗어나 가정으로 오면 몸에 베인 노하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아래 문장을 볼 때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흑역사가 떠오른다.
본질보다 문화적인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해서 <중략> 왜 자신의 열정이 앞선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도 같은 열정을 강요하는가? 왜 집회라면 빤히 나올 법한 정답을 요구하고 모범 답안이 나오지 않으면 불편해할까?
위 문장을 차분히 다시 읽으며 속으로 말을 해본다.
결론에 도달하지 말고 교류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여,
그들의 개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듣는다
이를 비폭력 교류라고 부른다면 내가 잘하는 부분과 약한 부분이 분명하다. 잘하는 부분과 겹치는 내용이 책에 있다.
은혜에 반하는 모습과 볼편한 발언도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얼마나 성숙한 공동체인지 가늠할 수 있다.
반면에 내가 취약하고 자주 놓치는 부분도 책에 있다.
꾸밈없음은 신중함과 짝을 이루지 못할 때에 여린 자매형제를 베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나의 결핍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장을 살필 차례다.
비정규직 같은 거야 능력 없는 루저loser나 잉여를 위한 자리이고, 나 자신은 바다에 빠져 죽을 일이 생기지 않을 테고, 우리 집에 장애인은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서 그런가?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주 작은 노력은 시작했다. <그대가 조국>을 후원하고, 정치인을 후원하며 대의 정치 아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소극적인 수준에서 하고 있다.
나는 독립운동가와 예수 모두를 경외감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폭력이라 하지 않듯이 <중략> 독립투사를 테러리스트라 칭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성이라는 것이 있고, 무리한 시도로 달성할 수 없는 허튼 꿈을 꾸기보다는 작은 발걸음으로 내가 배울 수 있는 점을 배울 정도로는 그들을 바라보고 싶다.
1. 세 표현을 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비종교인이지만 저자가 기독교인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내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