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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an 23. 2023

신앙은 긴장을 살아내는 예술

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3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욕쟁이 예수> 중에서 '양다리 예수'와 '술꾼 예수' 내용 중에서 밑줄 친 내용을 기준으로 메시지를 도출하고 생각을 덧붙인 글이다.


신앙은 긴장을 살아내는 예술

아래 단락을 다시 읽자 김기석 목사님의 아침 기도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간구하는 표현이 떠오른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 생각, 입장을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덮어씌우는overwrite'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교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과 어울리게 하시며, 우리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마주치게 하는 분이다.

표현 자체는 어색하다. 순리대로 살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이 내가 조금 편하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내 선호를 떠나면 나는 저자가 하는 말이나 김기석 목사님의 교훈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나의 경험과 기억은 자연스럽게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도 소환한다. 이러한 깨달음과 삶의 이치는 다른 종교를 갖거나 비종교인이라도 익힐 수 있다.

'나의 생각' 볼륨을 올려서 '하나님의 뜻' 볼륨과 화음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을까? 물론 '하나님의 뜻'보다 볼륨이 더 커지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이들 교훈을 메시지로 묶을 수 있는 훌륭한 구절이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됐든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복음gospel'과 급변하는 우리의 '상황context'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tension'을 살아 내는 예술이다.


신앙,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과정

어떤 이유인지 잊었지만, 별표까지 쳐놓은 문장이 있다.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다시 추론해 보면, 긴장은 경계에 설 수 있게 해 주고 그게 내 외부에 있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의 기본 조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긴장을 기피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긴장은 우리를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구도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긴장을 기피하는 까닭이다.

'띵~' 하고 또 다른 깨달음을 촉발시키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이 단순화의 폭력에 기대는 것은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을 없애 주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에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불확실성이란 놈은 우리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불확실성의 고통'을 피하려고 우리는 폭력적인 행동과 언사를 한다.

사람과 사회와 하나님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과 단정적인 발언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안다.

<당신이 옳다>를 읽기 전에는 그 폐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충조평판'을 떠오르게 하는 문구다. 어쩌면 단순화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신앙의 힘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신이 옳다>는 나에게 바이블 같은 느낌이다.


안정 속에 오래 머무는 일은 우상 숭배

놀라운 문장이다.

매번 확신 속에서 머무르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심리적 안정감을 의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2016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부자 아빠의 미래 설계>란 책을 읽을 때, 위험을 기피하고 안정만 추구하는 일을 미신으로 규정하는 표현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책을 읽고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는 점이고, 영원이 잊히지 않을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위 문장을 기요사키 글의 해당 표현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뒤이어 성경에 나오는 '충조평판' 사례를 다룬다.

욥에게 친구들은 "선인은 잘 되고 악인은 망한다"라는 즉각적 지식, 단정적 답변으로 욥에게 폭력을 가했다.

즉각적 지식과 단정적 판단에 머물고 싶은 욕망은 중도를 논하며, 참여는 없이 말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믿음을 자랑하느라 상처를 주는 우를 범하지 않기

59쪽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은 내가 지난해 가장 크게 잘못한 일들을 떠오르게 하는 내용이다.

여러분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해 보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고 나가면서도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다소라도 남에게 해가 되거든 그 일을 하지 마십시오. <중략> 믿음에서 벗어란 일이라고 느끼면서 하는 일은 무엇이나 죄가 됩니다.

나는 종종 강한 자기 확신을 넘어서 남에게 내 믿음을 강요하는 우를 범한다. 작년에는 실제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던 듯하다. 반성하고 감정과 행동을 다스릴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나도 아래 문장을 마음에 두어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 취향이 우상이 되고, 내 즐거움을 이웃의 생존 문제보다 우선하는 못돼 먹은 시대에 그리스도인까지 그럴 수는 없잖은가.

마음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하는 문구다.


지난 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연재

1. 그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되어라

2. 분노의 속살을 어루만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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