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4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욕쟁이 예수> 중에서 '겁쟁이 예수'와 '모노태스커 예수' 내용 중에서 밑줄 친 내용을 기준으로 메시지를 도출하고 생각을 덧붙인 글이다.
'겁쟁이 예수' 장의 핵심 문장이다.
공포야말로 이 세상 모든 야만과 폭력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지난 글에서 '불확실성의 고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폐해를 다뤘다.
많은 사람이 단순화의 폭력에 기대는 것은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을 없애 주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에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불확실성이란 놈은 우리의 평안을 갉아먹는다.
<월말김어준>의 박문호 박사님의 뇌과학 강의 덕분에 '불확실성의 고통'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행동을 하기 위해 예측을 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으면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을 다스리는 일은 그래서 뇌과학이 아니더라도 많은 분야에서 해법을 내놓은 듯하다.
불교의 지혜를 현대어로 전하는 시골 농부님의 글에서도 '불안을 찻잔 속의 미풍'으로 다루라고 한다. 또한, 작년 초에 인상 깊게 읽었던 <스틸니스>에서도 불안을 잠재우는 키워드로 Enough를 주문한다.
나에게 난제는 공포에 눌린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느냐의 문제다. 경험상 말로는 도울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딱 한 가지 도구만 알고 있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편에서 손웅정 님이 아들 손흥민에게 했다는 말이다.
흥민아, 괜찮아. 잘했어. 너 안 다쳤잖아. 너 잘 뛰었잖아. 아빠는 이걸로 충분해.
바로, 'It's enough!'를 이웃들에게 자주 실천하는 일이다.
저자는 틱닛한 스님의 글을 인용한다.
틱낫한 스님은 <깨어 있는 마음의 기적>에서 설거지를 즐기는 비결을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온 마음과 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이럴 수가. 우리는 바울이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노승에게서 듣는다.)
이 글을 읽을 때 한동안 외우던 중용 대사가 떠올랐다. 그런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정성을 말하면서, 내 경험 속에 온전히 내가 현존하는 상황이란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래 저자의 글도 마치 중용의 글귀를 풀이한 듯하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 습관적으로 하는 일 하나라도, 그 일 자체를 지각하는 가운데 주께 하듯 정성껏 하면, 살아가는 매 순간이 신비요 기도요 묵상이 된다.
중용 문구 속에서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데, 마치 책에 그 상세한 예를 들어주는 듯한 문장이 있다.
아이와 놀 때도 의무적으로 '놀아 주지' 말고 놀이 자체에 몰입해서 아이보다 더 흥겹게 놀아 보라. 누가 그런 엄마와 아빠, 그런 이모와 삼촌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중략> 단 몇 분이라도 좋으니 내게 온전히 몰입해 주는 사람, 나를 온전히 환영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의 말대로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마더 테레사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한 번에 하나씩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같은 사업 모델이라도 시점마다 집중해야 할 일이 달라진다는 교훈도, 일과 시간에 목표를 지향하고 동시에 내면의 흐름을 관리하려고 만들어낸 세션 관리라는 업무 유형도 본질적으로 모노태스커로 현재에 머무는 훈련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마더 테레사의 글을 읽으니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뭇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하나는 경외감이 만든 생각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1]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한 방울의 물'에도 충분한 가치를 느끼고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지 못하기에 경외감이 든 것 같다. 그리고, 'It's enough'를 자신 있게 말하려면, 삶의 태도에 깊숙하게 테레사의 교훈을 배양해야 할 듯하다.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지 않는 일이다. 2014년 내가 노력하는 일들이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은 고통이 되었다. 그 고통을 부르는 이름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덕분에 인생책인 <대체 뭐가 문제야>를 만날 수 있었다.
최근에 나는 새로운 유형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인지하고 있다. 서로의 비전이 다른 상태로 함께 협력한다고 오해하는 일이다. <성공적 대화를 돕는 그림>을 일회적인 대화가 아니라 교류에 대입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막는 도구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교계에서 이런 글을 찾지 못해 다시 한번 틱낫한 스님에게 신세를 지는 점이 아쉽다. "그냥 대지 위를 천천히 걸어라. 차가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라. 다음, 생각을 놓아 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는 미소. 그대 발걸음마다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나는 느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당신이 이미 도착했다.You have arrived."
실천한다고 생각해 보면 틱닛한 스님의 웅장한 문구보다는 시골 농부님 책의 <2초 동안 생각을 멈추기> 장에서 알려주는 방법이 나에게는 더 와닿는다. 여러 선지자들이 알려준 방법을 꾸역꾸역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에 나 스스로를 소외시킬 수 있는 무서운 현실을 알려주는 글귀로 글을 마친다.
직장, 가정, 학교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동안 거기에 내가 없다. 우리의 경험 속에 우리가 현존하는 것은 남는 시간을 빌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기도할 때, 소비할 때, 여행할 때뿐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일상에서는 자신이 아닌 존재로 버티다가 여가나 휴가에만 겨우 자신으로 존재하는 분열이 심해졌고, 이는 사회의 정신질환 증가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1]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어쩌면 '무아無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글로 설명할 만큼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