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잇zine 4호 - 함께 일한다는 것
리드잇zine 4호에도 기고를 했습니다. 종이책으로 배포되는 것이라 교보문고측의 허락을 얻어 공개합니다.
함께 일하는 방법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만큼은 함께 성장해야 한다. 나도 성장하고, 팀이나 회사라는 공동체도 성장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도 성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투명하게 논의할 수 있는 환경 (민주적일 것)
나부터 실천할 것 (구호보다 행동)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
함께 일하며 함께 성장하는 3가지 덕목을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민주적으로 함께 일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질 당시 나는 중국에 살았다. SNS와 뉴스로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연대의식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나인데, 외국에서 지내서였을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어쩌면 세월호 사건 때 아무것도 못 했던 것이 미안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촛불집회에 중국인들도 놀라워 했다. 기업이나 정부나 당이 주도한 것이 아닌데 자발적으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사실을 내 주변 중국인들은 하나같이 경이롭게 생각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 자유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권위주의 정부 치하에 살고 있기에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박정희 시대에 살았던 노인들이 나와 생각 차이가 극심한 이유에 빗대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일에 살던 지인이 유럽인들이 얼마나 촛불집회를 놀라워하는지 열변을 토할 때, 내 안에 모국의 시민의식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생겼다. 케이팝 등을 언급하며 ‘국뽕’ 발언하시는 분들을 타박하던 내가 촛불집회에 대한 유럽의 평가에는 우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항상 나는 빚진 마음이 있었다. 나중에라도 뭔가 꼭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갑자기 서울로 생활 기반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업의 일부로 한국 기업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돕기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협업을 잘 하도록 유도하는 실천지침의 기저에 깔린 원칙이 민주주의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기를 2년 가까이 했더니 요즘에는 자신이 생겨서 거의 매일 민주적인 업무 환경과 직장 문화에 대해 지인들에게 강조한다.
민주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발언할 수 있고, 모두에게 정보가 공유되는 환경이다. 그리고 서로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름을 인정하여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을 실천하는 일이다. 원칙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기술적으로는 지난 <리드잇Zine> 2호에 기고한 현장과 의사소통을 돕는 협업도구 두레이에서 밝힌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원칙만 간략히 쓴다.
아쉽게도 디지털 전환을 논하는 많은 기업은 실상 디지털과는 매우 동떨어진 환경이나 문화에 놓여 있다. 수평적 문화를 도입하겠다며, 모두를 ‘담당’으로 부른다거나 ‘님’으로 호칭한다고 해서 과연 바뀌는 것이 있을까? 그보다는 민주주의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는 XP(익스트림 프로그래밍, eXtreme Programming)에 대한 이야기다. XP는 켄트 벡(Kent Beck)이 정리한 애자일 가치관과 실천법이다. 이 글에서 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으니 내가 과거에 기고한 글 일부(https://brunch.co.kr/@graypool/219)를 인용해서 설명을 대신하기로 한다.
한 페친의 글에서 점수(漸修)라는 표현을 보았다. 보자마자 내가 알고 있는 표현은 XP인데, 돈오점수의 점수란 표현도 XP와 유사한 개념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침 XP에 대한 글을 쓰던 때에 애자일에 대해 묻는 후배에게 영화 <역린>의 한 장면이 담긴 무비 클립을 보여준 적이 있다. 영화에서 정조가 <중용> 23장을 묻는 장면이다. <중용> 23장의 내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은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동료가 나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이를 탓하거나 나도 적당히 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떤 조건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평가에서 유리한 방법으로만 일하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익스트림(Extreme)한 것이다. XP는 이것을 알려준다. 마치 <중용> 23장을 프로그래머가 실천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듯하다.
최근에 함께 일 하는 동료들의 태도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만 초점을 두면 우리 모두가 사람이란 점을 잊게 된다. 과거에 선배들은 직장에서 ‘공사구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에 깔린 저의는 매우 폭력적이어서 나는 이 표현을 매우 혐오했다. 사적인 모든 조건과 내면의 감정을 무시하라는 태도가 담겨 있어서 그렇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엄중한 상황도 아닌데, 사무직으로 일하며 그럴 일이 뭐가 있는가? 하물며 지식노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는 서로 생각이 다른 점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협업이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역시 기능과 결과 위주로 사람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 또한 부족했던 것이다. 우연하게 중국 땅을 밟은 후에야 그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자 의견이나 정보를 소심하게 표현하는 동료들이 좀 더 마음을 열고 상대 동료를 받아들이도록 변화시키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3년의 시간 동안 일부는 나아졌고, 두 명은 나를 떠나갔다.
그 과정을 회고하며 나는 오랜 시간 컨설팅 회사에 다니면서 기간 내에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직무 환경에 무비판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들의 일상보다는 ‘오늘 하기로 한 일은 다 했나? 이슈는 없나?’만을 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경험 덕분에 나는 동료가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취향과 속도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이를 ‘개취(개인취향) 인정’이라 부르곤 한다. 중국에서 떠나왔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 하기로 한 일과 무관한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는 태도와 습관을 마음에 품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일하는 동안, 모두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리더라면 동료들의 (일과 무관한) 취향과 속도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여러분이 협업을 잘하고 싶거나 진정한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동료의 취향과 속도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리눅스 제품에 쓰이는 말인 우분투(ubuntu)는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는 공동체 의식을 담은 아프리카 반투어라고 한다. 우리는 선조들과 동시대인들의 교훈을 단지 철학이나 종교의 범주에 가두어 두고 있지 않은가? 혹은 다른 나라 이야기나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것인가? 우리의 직업 일상에서 그러한 아름다운 교훈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