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9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욕쟁이 예수> 중에서 '유색인 예수'와 '목수집 큰애 예수' 내용 중에서 밑줄 친 내용을 기준으로 메시지를 도출하고 생각을 덧붙인 글이다.
외국살이를 해본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서구와는 달리 국민들이 나라 돌아가는 일에 관심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다 보니 좀 시끄럽긴 하지만, 이것도 다 나라를 바르게 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식민지였던 나라 중에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국뽕이 차오는 것 말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이룬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거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경제 수치와 같은 숫자놀음으로 한 나라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판단하는 것은 복음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문화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를 보는 일은 유익하다.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항시 중앙집권이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니 해외 진출을 도모함으로 발생하는 해상 거점은 중앙 집권체제에 커다란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인용한 중국 이야기는 <오리진>을 떠올리게 한다.
유럽은 좁은 땅에서 경쟁이 심하다 보니 시야를 외부로 돌리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편서풍이 무사히 대서양을 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지정학적 영향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는 일은 성경에서 교훈을 캐내는(?) 일과도 유사하다고 본다. 환경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니까.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유사하다.
유럽에서 가장 윤리적이라는 독일이 일본처럼 파시즘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음악이 흔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처음 알았다.
예로부터 추위와 맞서 싸워야 했던 백인들은 일찍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기술 문명이 발달한 반면, 연중 산물이 풍부한 열대에서는 흑인들의 여유로운 성품에 맞춰 산업 대신 음악이 발달했다.
내가 <팩트풀니스>를 다시 읽으려고 꺼내드는 이유가 저자가 설파한 주장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30대 이상 흑인 남성 중 65퍼센트가 최소한 한 번은 체포된 경험이 있다는 통계치를 접하면서 우리는 인종 편견을 확증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인종 평등으로 갈 길이 요원하다는 것을 절감해야 한다.
비교의 잣대로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개성으로 보면 다르게 볼 수 있다.
백인이 지식과 기술의 측면에서 인류에 공헌했다면 흑인들은 춤과 음악과 스포츠의 영역에서 우리네 삶을 가멸게 했다.
경외감을 일으키는 문장이지만, 선뜻 실천과 연결할 수는 없다.
탐욕을 숭배하지 말고 이웃 및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라고 외치는 우리 시대의 선지자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존재하는 일에 대해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를 갖자고 마음먹는다.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가정의 가치를 말한다.
우리 안의 거짓된 단일민족 신화와 그에 기초한 국수적 민족주의를 바꿔 줄 선지자들이며 <중략> 조금만 다르면 억압이 가해지는 한국 사회의 전체주의적 획일성을 고쳐줄 치유자들이며
단일민족 신화가 허구라는 저자의 주장 탓에 떠오른 기억이 있다. 예전에 족보대신 네이버에서 가문의 이력을 검색해 보니 당나라의 李성을 가진 조상이 오랑캐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고려에서 安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UN 통계에 따르면 불과 80년 이후인 2100년 한반도 인구는 0으로 수렴한다고 한다. 우리가 외국인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말로 UN 통계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보다 훨씬 더 '상처받기 쉬움vulnerability' 속을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을 정직하게 대면한다면 레비나스Emanuel Levinas가 말했듯 그 연약한 얼굴이야말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명령하는 예수님의 목소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조망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우리 자본주의 경제의 하나의 주된 도매상이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선물을 강제적으로 교환하게 되고, 그 결과 상인들이나 제조업자들만이 큰 치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일전에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린 "산타 오셨네, 예수 우셨네Santa Came, Jesus Wept'라는 말이 한 번 웃고 지나갈 말이 아닌 것이다.
종교인이 아니지만 나에게도 역시 울림을 주는 문장이 내가 마지막으로 밑줄 친 글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용한 물질이 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쓸 수 있는 물질이 되어야 한다.
8. 정치적이지 않은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