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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an 15. 2018

동갑내기 커플의 미국여행

#3. 나파밸리, 파리의 심판


나파밸리에 가는 날, 아침 11:00


 어젯밤 역시나 잠을 설치고야 말았다.

안좋은 몸상태와 시차 부적응으로 인해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통 아침에 깨우는 당번은 나인데, 눈을 떠보니 이미 오전 11시. (G도 세상모르고 잤다.)

원래는 9시에 렌트를 해서 떠나는 일정이었는데 호텔을 나와보니 12시가 되어있었다.


 G와 내가 여행에 있어서 잘 맞는 부분 중에 하나는 계획대로 안된 것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다.

'늦게 일어났는데 어떡하지?', '다음 일정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한데?' 등의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의 머릿속암묵적으로 이런 생각이 있는 것 같다.

1. 여행 계획이란 유동적인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계획을 지키는게 아니라, 비일상의 모험을 즐기는 거다)
2. 이미 벌어진 일은 후회한다고 돌이킬 수 없다.
3. 그러므로 현재의 감정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느지막이 렌트를 하러 Hertz에 갔다. Hertz에는 3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중국계로 보이는 아시안 남성이 우리의 예약을 받아주었고, 그 옆에는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우리의 업무를 친절하게 봐주면서도 시종일관 수다를 떨었다.


한국에서 생소한 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기아 포르테를 받고야 말았다. 아쉬운 기분도 잠시, 12월 한국보다 훨씬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운전을 하다보니 어느덧 말로만 듣던 금문교를 지나고 있었다.


12월의 금문교


"와, 이게 그 유명한 금문교야?"
"그런가봐!"

"근데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한거야?"
"글쎄..."


여행이 끝나고서야 왜 금문교가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가 되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1.6 마일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와, 샌프란의 조류와 바람을 견디는 튼튼한 다리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기적에 가까웠다고 한다. 1937년 금문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페리를 통해 샌프란과 마린카운티를 오갔지만, 이 다리가 세워진 이후로는 약 10억개의 차가 이미 이 다리를 오갔다고 하니, 과연 역사적인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이미 1시가 넘어가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와이너리 근처에 있는 Oxbow Market에 들어가 피자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빈속에 와인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Oxbow Market에서 먹은 피자와 미트볼 샌드위치



나파밸리의 와이너리, '파리의 심판'의 주인공들


 금문교도 잘 몰라봤을 만큼, 여행지에 대해서 공부도 안한 우리가 유일하게 검색해온 것이 있다면 바로 와이너리다. '나파밸리에 가면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많을텐데, 어디를 가야할까?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테이스팅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될까? 아니면 로버트몬다비처럼 한국에 잘 알려진 브랜드를 찾아갈까?'


고민 중에 G가 '파리의 심판'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 <와인 미라클>의 소재가 되기도 한 사건인데,

1970년대 당시 프랑스 와인만 최고급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모든 품종 카테고리에서 프랑스산을 꺾고 1위를 한 사건이다. 단연 이 사건으로 와인업계는 적잖은 충격이 있었고, 오늘날 캘리포니아 와인 명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우리는 이 파리의 심판에서 무려 레드부문 1위를 차지한 Stag's Leap Wine Cellars를 방문하기로 했다.

과연 입구에는 파리의 심판 내용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창 너머로는 포도밭을 바라보며 와인 테이스팅

화이트 2잔과 레드 4잔이나 시음하게 해주었는데, 잔마다 가득 따라주는 바람에 테이스팅을 하다가 취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Tasting Fee는 $45 정도였으나, 와인을 구매하는 바람에 면제받을 수 있었다.)

 

 연극영화과를 전공했다는 저 분은 정말로 열정적으로 와인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는데,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와인도 가득 가득 따라주었다.) 밝은 에너지가 가득찼고 덕분에 대화도 많이 하게 되었다.


 Stag's Leap 와이너리의 밭은 크게 FAY와 S.L.V.  밭으로 나뉜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토양이나 햇빛의 차이로 와인의 풍미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한다.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을 거머쥔 와인은 S.L.V.였지만, 과일향의 풍미가 더 가득한 FAY가 더 마음에 들었다.

 FAY가 맘에 든다고 하자, 활기찬 직원이 'Heart of FAY'라는 리스트에 없는 시크릿 와인도 들고와서 시음을 시켜줬다.


"Is this wine named because it was from the center of FAY vineyard?" 라는 나의 장난스런 질문에

놀랍게도 그는 "You're absolutely right!"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두번째 방문한 와이너리는 Clos Du Val이라는 와이너리로, 역시 1976 파리의 심판 때 좋은 성적을 거둔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중에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노무현 대통령이 만찬에서 사용한 와인이라 대통령의 와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South Korea에서 왔다고 했더니 역시나 자랑스럽게 이 얘기를 꺼내며 소개했다.


Clos Du Val 와인 테이스팅

 

예약제로 운영한다던 'Clos Du Val'의 테이스팅 테이블


 사장님까지는 아니어도 중간관리자급은 되보이던 직원은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여러가지 품종을 블렌드한 보르도산 와인보다 왜 캘리포니아 와인이 더 맛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가 몇가지 질문을 던지자 직접 와인 저장고로 데려가 구경을 시켜줬다. 와인을 제조하는 작업이 얼마나 섬세한 일일지 상상은 해보았으나, 헝가리산 오크통이니, 프랑스산 오크통이니, 오크통 나무 원산지까지 고려해가며 숙성시키는 과정을 전해들으니 더 새로웠다.



다시 샌프란으로


두 개의 와이너리를 천천히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저녁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날 처음 느끼게 된 것이지만 12월 샌프란시스코의 해는 정말 빨리 진다. 저녁 6시가되면 밤 10시가 된 것처럼 깜깜해진다.)


 일단 샌프란으로 돌아가 저녁을 해결하기로 한 우리는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핸드폰이 말썽이었다. G와 나는 핸드폰이 모두 2년이 훌쩍 넘어 배터리수명이 짧아진 상태였다. 그 흔한 배터리팩도 안챙기고 하루종일 카메라니, 구글맵이니 틀다보니 배터리가 급속도로 줄었는데 설상가상 차량용 충전기의 효율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1%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5분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는 감에 의존해 운전을 시작했다. '일단 남쪽으로 가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한국에서도 내비없이 운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타지에서 왜 그런 낙천적인 생각을 했을까?


내비가 없으니까 까막눈이 된 것 같았다.


이삼십년 전에는 내비도 없이 사람들은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고 다닌걸까?
몇 시간 후에, 지금 내비없이 운전한 것을 잘했다고 여기게 될까? 아니면 후회하게 될까?
지금이라도 정차해서 다만 이십분이라도 충전하고 길을 보고 다시 출발하는게 낫지 않을까?
만약 이게 인생이라면, 나는 그냥 감에 의존해 달릴까? 아니면 멈춰세울까?


 한참을 운전하던 우리는 점점 인적과 빛이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정차해서 핸드폰 충전부터 하고, 내비를 보고 다시 출발하로 했다. 사실 알고보니 우리는 점점 서쪽의 시골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멈추기를 정말 다행이다.


 갤럭시의 초절전모드를 십분 활용해서 다행이 1% 충전상태로 장장 1시간 반의 운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밤의 금문교는 더욱 빛이났다.

밤의 금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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