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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Nov 30. 2018

가오슝의 밤


요원한 약속

누구나 가끔 요원한 약속을 하곤 한다. 몇 년 뒤에는 뭘 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최근에 나는 남자 친구에게 "우리가 서른여섯이 되면 유전자 검사받자."라고 말했다. 이 약속은 지켜질까?


이십 대 중반쯤이었던가. "서른이 되면 우리 셋이만 방콕에 가서 마사지받고 술 마시고 호캉스 하러 떠나자."라고 했던 대학 친구 K, Y와의 약속이 얼마 전 성사되었다.


우리는 서른이 되었고, 방콕은 아니지만 대만 가오슝에 가기로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서른이 되어도 호사스러운 여행은 큰 마음을 먹고 준비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대신 가성비 좋은 곳을 따지고 따져 예약했다.


처음부터 우리가 이렇게 여행을 갈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학 친구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다가 일 년 일 년 지나면서 서서히 어쩌면 아직도 가까워지는 중(헨리의 표현을 빌리면 Emo의 관계로 변하는 중)이다.


관계가 깊어진 데에는 K의 역할이 컸다. K는 참 재밌는 애다. 이십 대의 대부분은 여러 남자들과 가볍지만 유쾌한 에피소드를 가득 생성하며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항상 Y와 나의 잔소리를 듣는 캐릭터인데, 기꺼이 힐난의 대상이 되면서 주위 사람을 유쾌하게 만든다. 또, 자기 일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친구라 그 빡세다는 대행사를 거쳐 대기업으로 이직까지 했다.


참, 적극성에 대해 말하자면 Y는 상위 1%다. 그녀는 대학 때부터도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고 학번장까지 했던 터라, 이 친구가 정치 쪽으로 나간다 하여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Y의 이십 대 후반은 참 바빴다. 4개 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남탕 회사에서 수도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며 바삐 산다. 맘고생하며 사귀던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고, 소개팅해서 새로 만난 한참 오빠인 남자와 삼 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또 바로 임신을 해 이제 벌써 다섯 살을 앞둔 딸이 생겼다.


요원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왔다.

그다지 오래전에 한 약속 같지도 않고, 그때 약속을 했던 내가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는데 이렇게 적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변화

절대로 정착할 것 같지 않던 K는 심지어 싸우지도 않고 제일 안정적으로 연애를 한다. 항상 조금은 모나도 취향 확고한 예술병 걸린 남자만 좋아하더니. 지금은 세상 무난하고 사회적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Y는 결혼과 출산을 겪었으니 말해 입이 아프지만, 최근에는 그녀의 라이프스타일까지도 큰 변화가 생겼다. 회식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그녀는 더 이상 과음하지 않는다. 그녀의 라이프 중 가장 큰 키워드는 '건강'이다. 야채와 과일, 건강한 조리법과 물 보충이 요즘 그녀를 사로잡는 것이다.




가오슝에선 날씨 운이 참 없었다.

그다지 덥지는 않았지만 습한 날씨에 미세먼지가 아주 심했다. 피부와 머리카락에 초미세먼지가 딱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놈의 미세먼지를 여행에 가서까지 만나다니. 앞으로 여행 가기에 앞서 미세먼지 체크는 필수다.


대신 우리는 호텔에서의 수다, 약국 쇼핑, 그리고 밤거리를 활보했다.
그날 밤 한참을 수다 떨며 걷다 보니 시원한 맥주가 시급했다. 이자카야에 가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시원한 생맥주를 먼저 들이켜야만 할 것 같았다.


대만 사람들은 술을 잘 안 먹는 걸까? 맥주 집을 찾고 헤맸지만 온통 찻집, 밥집뿐이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아트 뮤지엄 근처에 있던 ZhangMen이라는 수제 맥주집을 발견했다. 발 빠른 Y가 우연히 발견한 술집인데 20여 개가 넘는 종류의 탭이 있는 꽤나 좋은 수제 맥주 집이었다.



주량

누가 제일 술을 잘 마실까? 확실한 건 꼴찌가 나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건강한 라이프를 추구하느라 술을 멀리한 Y를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꼴찌로 점찍어야 할 것 같다.

ZhangMen에서 샘플러로 목을 축인 우리는 본격적으로 각자 마실 맥주를 골랐다. 나는 술을 멀리하는 Y를 나름 배려한 마음에서 얘기했다.


넌 요즘 술 못 마시니까 도수 낮은 걸로 먹으면 되겠다!

그게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할 줄이야. 그 얘기를 들은 Y는 갑자기 웃음기가 삭 가시더니, 자존심이 상한다며 왕년의 회식의 여왕답게 가장 센 술을 시켰다. K와 나도 지지 않고 맞불을 질렀다. 술을 뺄 것만 같던 Y가 그렇게 나오니 흥이 돋았다.



그러나 2차로 이자카야를 오자마자 그녀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웬일인지 위가 콕콕 쑤시며 아프다는 것이다. 여행까지 와서 술은 물론이고 맛있는 음식 앞에 두고 먹지도 못하는 Y를 보니 맘이 안 좋았다.

건강을 더 추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녀는 예민해졌다. 안 좋은 음식이나 환경에 몸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니, 더 좋아진 것일까? 마음과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그녀가 조금은 걱정되었다. 직장, 육아, 남편과의 자잘한 갈등 등 스트레스 많은 환경에서 Y는 쇼핑욕도 식욕도 없다는데, 어디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도쿠리 두 개를 비워내고 일찌감치 호텔로 들어와 K와 나만 맥주 한 캔씩을 더 하며 새벽 세시까지 이야기를 했다. 셋이서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침대에서 잠들지 않고 했는 지금 생각하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항상 술이 없으면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맘 속의 어려운 고민거리나 과제는 누구나 꽁꽁 숨기고 회피하고 있어서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린 술도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하다. 감추려는 경계를 술이 풀어주고, 친구는 그걸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미드 Billions에 나오는 상담사 웬디는 당사자도 모르는 심리를 알아채서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고쳐준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와 여행을 가면 의도치 않게 주도권을 잡곤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나보다 한 발 빠른 그녀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묻어갔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내 성격을 일부러 조정하는 건 아닌데 주위 사람들의 색깔에 따라 내 색깔이 달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그룹에 가느냐에 따라 나는 캐리도 되고 사만다가 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이런 말을 자주 썼다.

"나 중학교 때, 나 고등학교 때, 나 대학교 2학년  때"

서른이 되고 보니 이런 말도 심심치 않게 하게 됐다. "그게 한 칠팔 년 전이야"

나중엔 이런 말도 하게 될 것이다. "십오 년 전인가? 아니다, 이십 년 전이야"


살아가며 먼 훗날 바라보며 아득히 했던 기약들도 더 많이 이루기도 져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약속을 했던 순간을 회상할 것이다. 이런 요원한 약속은 대체로 일단 제약없이 순수한 희망만을 담는다. 그래서 소중하다. 소박하지만 별 생각없이 했던 요원한 기약들도 내 인생의 dot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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