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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an 27. 2019

회사의 언니들


신입사원 시절 내가 속한 영업 A팀에는 70명의 팀원이 있었다.

주로 삼십 대 중반 ~ 사십 대의 남자 무리들에서 내게는 여선배 Y, S, H가 있었다.

스물여섯의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어려워하는, 혹은 후배나 동료가 아닌 여사원으로 대하는 사람들 틈에서

여선배 Y, S, H는 내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Y 선배는 첫 출근 날 퇴근 후 서울 시내로 가서 내게 꽤 근사한 저녁을 사주었다. 몇 년 뒤에야 퇴근 후 시간을 회사 사람한테 할애한다는 것도, 사비로 뭔가 사준다는 것도 엄청나게 친절한 행동이란 것을 깨닫게 됐다.

5분 안에 점심식사를 후딱 해치우는 남자들 틈에서 우리는 서로의 식사를 챙겨줬다. 자비 없는 회식자리에서, 여직원을 회식자리의 꽃으로 삼으려는 몇몇 남자 상사들로부터 서로를 구해줬다.


언젠가는 Y 선배가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그에게로부터 똑같이 당했던 사실을 털어놓자 그녀는 더 분노했다. 그녀는 인사팀에 고발해서 어떻게든 그를 징계하고자 했으나 녹록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팀은 조직개편으로 조금씩 갈라졌다. 내가 속한 영업 B팀에는 더 이상 여자 선배들이 없었다. 서른 명의 남자들 틈에서 나 혼자만 여자였다. 상사는 술자리마다 내게 첫 건배사와 끝 건배사를 시켰다. 나는 회의 시간에도 항상 앞자리에 앉아야 했고, 모든 행사에는 필참이었다.

그래도 옆 부서였던 그녀들은 점심시간만은 나를 구출해줬다. 우린 다른 부서였지만 거의 매일같이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남자 많은 부서의 특성상 여직원의 사생활이 안주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른다. 난 딱히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이 애인이 있는지, 결혼 계획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시간이 또 흘렀다. H 선배는 해외 파견도 다녀왔고 과장을 달았다. 결혼도 했다. S 선배는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Y 선배는 영업을 떠나 마케팅팀으로 갔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애인에 대해서, 앞두고 있는 수술에 대해서, 커리어에 대해서. 내가 벌써 7년 차였다.


얼마 전 나도 Y 선배가 있는 마케팅 쪽으로 커리어를 바꿨다. 새로운 부서에는 여자가 70퍼센트에 달했다. 부서를 이동한다는 소식을 처음 전달했을 때 갑자기 H 선배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뭔가 마음이 이상하다고.

OO 씨까지 떠난다니까 마음이 이상하네요.

부서 이동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배 H의 이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나도 마음이 이상했다.


새로 옮긴 부서는 내 또래 여자들도 많았고 지금 내 직속 상사도 여자다. 식사 시간에 빨리 먹어야 속도를 맞출 수 있다는 압박감도 없다. Y, S, H 선배들과는 사무실 위치도 멀어졌다. 우린 하루 걸러 같이 먹던 점심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이주일에 한 번으로 점점 뜸해졌다.


얼마 전 선배 Y와 커피를 마시는데 속상한 얼굴로 과장 진급이 누락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입사 첫날 내게 저녁을 사주던 그녀가 생각났다. 지금의 나는 그때 그녀의 나이였다.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삼 년 뒤의 나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그녀는 과장을 달 테고, 나도 그럴 것이다.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간 차장도 될 터였다. 그 와중에 우리 중 누군가는 S 선배가 겪었던 수술보다 더 큰 수술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확히 그녀들이 밟는 길을 내가 따라 걷는 것 같았다. 모닝커피를 마시는 중이었지만 갑자기 취하고 싶어 졌다.


그녀들은 회사생활에서 내 롤모델이기도 했는데, 그녀들보다 몇 년 뒤엔 내가 그녀들과 사뭇 비슷하게 되어있다는 점이 묘하게 슬프게 느껴졌다. 그간 여자로서의 우리의 유대감이 특별하다고 느꼈었는데 갑자기 연약한 운명공동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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