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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Mar 27. 2019

3월의 단상

나를 만드는 시시콜콜한 날들


1분기가 벌써 끝나간다니. 새해가 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쓰겠노라고 다짐을 했는데 지키기 참 어려운 일이다. 습관만 들이면 될 텐데, 첫 마디만 시작하면 될 텐데, 그게 참 잘 안된다.


3월 1일

친구 B의 생일파티지만 큰 집에서 놀기 위해 A의 집에서 모였다. 좋아하는 음식과 술을 잔뜩 구비해놓고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 B의 생일은 우리 중 항상 처음이다. 언제나 먼저 나이를 먹어주어 고맙다. 나는 그녀를 보며 상대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B가 피트 시험과 취업 준비로 연태 여행에서 홀로 빠져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던게 불과 5개월 전이다. 지금은 번듯한 은행원이 되어 신세가 달라졌다. 신분이 뭐라고. 그것 하나로 정말 많은게 변했다.


3월 3일

집을 나서다가 뒤돌아 한 장 찍었다. 살면서 수없이 보았던 광경.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장면. 이 사진에 담긴 모든 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3월 3일

제철인 튤립을 사들고 대학 친구 J집에 갔다. 4개월된 갓아기의 엄마가 된 J는 관심사가 이 전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애를 바라보며 내 세상 전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J가 새삼스러웠다. 내가 알던 똑 부러지는 뉴스 앵커가 아닌 아가페적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봐왔던 다른 아빠들 보다도 아기를 잘 봤다. 육아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한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 맘 때쯤 엄마들이 겪는 육아에 대한 고통이 J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랄 J의 아이가 기대됐다.


3월 6일

회사 회식을 했다. 나는 오락 부장이다. 장소 선정은 물론이고, 사람들 출석 챙기고, 주차장까지 알아봐서 안내 해 줘야 한다. 예산에 넘지 않게 주문할 수 있도록 중중간 정산해야 하고, 윗 사람들이 뭐 찾지 않는지 눈치껏 한번씩 봐줘야 한다. 자리 배치도 신경 써야 한다. 사원급이 하기엔 벅찬 일이다. 나는 대리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꽤 능숙하게 지나갔다.


3월 8일

중학교 친구 K가 쁘띠 성형을 했다. 둔한 사람이 보면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인상만 바꾸는 정도의 성형이었다. 예뻐진 그 친구를 보며 참 잘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얘길 들은 지인은 언성을 높이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전신 마취가 얼마나 사람 몸에 안좋은데, 그런 일에 마취를 하느냐고. 아, 그런가? 생각해보지 못한 포인트다.

K는 어렸을 때 몸이 좀 안좋았다. 정확히 무슨 병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대 수술도 몇 번 한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K는 매일 서너 개의 약속이 잡혀있는 약속쟁이에 엄청난 YOLO족이 되어있었다. 원래 성격이 그랬는지, 삶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 지는 모른다. 왜인지 K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지 않기로, 다시 생각을 고쳤다.


3월 9일

남자 친구 집에서 주꾸미와 일품진로를 마셨다. B 생일날 먹은 매운 갈비찜 배달 서비스에 반해 찾아보았지만 주변에 갈비찜은 없었다. 대신 주꾸미 삼겹살을 시켰는데 대만족이었다. 밥도 비벼 먹고, 라면 사리도 넣어 먹고, 수다도 떨고, 문제적 남자도 봤다. 일품 진로 두 병을 비웠다. 둘이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이렇게 한번씩 먹을 때면 그 누구랑 마시는 것보다도 편하고 재미있다. 이 날도 역대급 데이트였다.


3월 10일

2년 만에 파리 멤버가 모였다. H오빠의 청첩장을 받았다. 우리 멤버 중의 첫 결혼이다. 오빠는 말도 좀 느리고 어리바리한 면이 있다. 오빠 팔에 소원 팔찌처럼 생긴 팔찌가 있길래 자세히 보니 영락 없는 머리끈 고무줄이다. 여자친구가 건강 팔찌라고 채워줬단다. 아무래도 필요할 때마다 머리 묶으려고 오빠 팔에 껴둔게 아닐까? 오빠는 일년 가까이 끼고 있다는데... 언니가 그 팔찌로 머리 묶은 적 있냐고 물으니 종종 있다고 한다.


3월 15일

HIGASHI

우리 동네는 맛집이 별로 없어서 맨날 가는 곳이 정해져있다. 지겨워도 맛없는 안주는 버틸 수 없으니 맨날 그 집만 간다. 그런데 최근 우리 동네 지점으로 발령난 B가 회사 사람들로부터 새로 생긴 술집을 추천 받았다며 번개를 소집했다. 그 곳은 인테리어와 소품은 형편 없었지만 안주 맛 만큼은 우리의 단골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새로운 곳을 뚫었다는 기쁨에 엄청 시켰다. 닭껍질 꼬치, 쯔꾸네, 가지 튀김, 나가사키 짬뽕, 고로케까지.


 3월 16일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다. 회사는 내게 월급도 주고, 근무도 보장해 주고, 사회적으로 안락한 신분도 보장해준다. 하지만 열정을 불어넣어 주지는 않는다. 발산되지 않는 내 에너지가 아깝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아깝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 어떤 회사를 다니든 나름의 커리어를 쌓으며 의미있게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꼭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잘 적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다른 옵션과 가능성을 쭉 둘러봐도 된다. 그래서 복잡하고 고민이 된다.


3월 16일

아들이 결혼을 준비하면 며느리만큼 시어머니도 긴장한다. 친오빠 여자 친구가 처음으로 우리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기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우리엄마는 집 청소를 슬슬 시작했다. 전 날에는 아빠를 대동해 이케아까지 가서 이것 저것 소품을 사왔다. 백합까지 한가득 꽂아놨다.


3월 16일 

마포 서산꽃게

간장 게장 좋아하는 친구 H가 주도해 맛집을 데려갔다. 고깃집에 반찬으로 나오는 것이랑은 차원이 달랐다. 너무 차갑지고 않고, 달거나 짜지도 않았다. 촉촉한 속살에 고소한 내장, 매콤한 청양고추를 올리면 한 입당 소주 한잔씩. 3만 2천원의 가치가 있었다.


3월 17일

건대 북경성

G와 중국음식점을 갔다. 건대 중국음식 거리에 있는 식당 치고는 정말 깔끔 했다. 인테리어도 인테리어지만 훠궈 식재료 하나하나가 신선해보였다. 다음날 왜 장염에 걸렸을까? 훠궈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찜찜하기는 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나의 체력이 곤두박질쳤다. 너무 아파서 회사 7년차 만에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수액도 처음 맞아봤다. 너무 추워서 전기장판을 고온으로 해놓고 이불로 몸을 칭칭 감았다. 잠을 자고 또 잤다. 덕분에 금방 회복되기는 했지만 체력이 80% 선에서 아직도 회복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신체 어느 한 곳이 약해지면 면역력이 나빠질 때마다 같은 곳이 아픈 것 같다. 컨디션이 안좋아지니까 다시 심장이 말썽이다. 심장은 정말 무섭다. 관련 질환의 예후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심리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더 무섭다.


3월 23일

마포 서울동

주 당 8천원씩 맛집 계를 한 것이 벌써 세달 가까이 되었다. 이런 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넷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것 같다. 30대스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첫 메뉴는 카이센동이었다. 삿포로에 여행가서도 비싸서 못먹었던 카이센동. 맛은 있었지만서도 비싼 가격때문에 역시나 가성비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합정 어쩌다 와인

와인 바에서 점원이나 소믈리에가 와인을 추천해준다고 하면 좀 걱정된다. 지갑 사정으로는 제일 저렴한 가격대로 시켜도 부담되는데, 보통은 그 윗 급을 추천해 주니까. 맛집 계 덕분에 그래도 마셔보고 싶은 와인으로 턱턱 시켰다. 뭐든 제약에서 자유로워 지는 건 행복한 일이다. 가벼운 와인에서 풀바디 와인으로, 종류별로 마셨다.


3월 24일

날이 좋았지만 요즘 피곤해서인지 집 데이트가 부쩍 좋다. G의 집에 커피와 빵을 사들고 갔다. 보통 아침 일찍 커피를 마시는 내게는 한참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주말 첫 커피를 같이 마신다는 게 좋았다.

저녁엔 G어머니와 여동생, 여동생의 애기가 집으로 온다고 하여 밥을 같이 먹었다. 오랜 만의 고기다. 갑자기 아파서 저하됐던 소화력이 제기능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천천히 오랫동안 맛있게 먹었다.


3월 27일

부쩍 회사에서 일이 많아졌다. 야근하지 않는 선에서야 일이 많다는 건 없는 것 보단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에 근원적인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어느샌가부터 일 스트레스가 확 줄었다.

지난 주 아파서 운동을 쭉 쉬다가 오랜만에 트레이너를 만났다. 요즘 매니저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고 한다. 별 사소하고 잡다한 일까지 자기를 시키는 모양이다. 윗 사람들이 되면 다 그런가 보네요. 라고 말하려다가 완전 사이코네요.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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