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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May 30. 2019

흘려보낸 날들

31.4세


한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

흰 화면을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으면 뭐든 고백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게 자리를 정돈하고 마음의 문을 열 여유가 생기지가 않았다.


이래 저래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고민이 많으면 생각을 많이 해 봐야 하는데, 나는 회피형 인간인지 오히려 생각을 닫아버리곤 한다.


글을 안 쓴 지 한 달이 넘어가자 뭔가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맴돌기는 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버리면 정말 빨리 지나

가 버릴 거라고. 너가 어떻게 사는지 너 조차도 잘 모를 거야.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칭다오 여행

4월의 시작은 칭다오 여행으로 열었다. 중학교 때 친구 무려 다섯 명이 모였다. 다들 먹는 걸 좋아해서 모임 이름도 먹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지었다.


부지런함으로 따지면 이 모임에서 나는 하위권으로 가야 한다. 내게 이틀 치 스케줄이 이들에게는 하루, 혹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비록 나는 중국도 많이 가봤고, 칭다오도 두 번째이고, 여행 중국어 정도는 할 줄 알지만, 최대한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친구의 딸과 함께 식사를 한 일이 기억났다. 네 살 배기 딸 T가 새 음료에 빨대를 꼽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음료를 낚아채더니 빨대를 툭 꼽아서 마시라며 건네줬다. T는 그 일 때문에 한참 동안 심통이 났다. 자기가 스스로 빨대를 꼽고 싶은데, 엄마 때문에 새 비닐에 빨대를 톡 하고 뚫는 경험을 못해서 화가 난 것이다. 다시 꼽으라고 줬지만 이미 구멍 뚫린 비닐에 빨대 꼽는 건 싫다며 입을 삐죽였다.


이런 생각까지 한 건 아니었지만,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가 경험해본 걸 안다고 착각하고 아는 척하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 같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걸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되지 말아야지.


부지런쟁이들 답게 아침마다 정말 일찍 일어나서 약속 시간도 전에 얄짤없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각자가 알아본 것들이 적절히 조화롭게 반영되었고 때로는 하고 싶은 것에 따라 갈라서  다니기도 했다.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여행 가서 모든 걸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없으면 싸울 일이 없다고. 모든 걸 같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의 시작이라고.




커리어

회사는 나쁘지 않다. 내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더 재미를 붙일 수는 있다. 여러모로 배울 점도 있을 것이고, 진급도 하고, 유능하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5년 선배, 10년 선배들을 보면 아, 미래의 내가 저렇게 되겠구나. 예상이 된다. 인간적으로 좋은 선배들이고, 다들 실력도 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살다가 저렇게 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슬프다.


누구보다도 안정성을 좋아하는 나인데, 내 미래가 예측 가능하단 이유로만 회사에 정을 못 붙이는 걸까? 왜 재미가 없는 걸까?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걸 쭉 적어본다.


- 내게 더 권한이 많았으면 좋겠다. 

- 더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 한 회사만 계속 다니는 건 다양성 측면에서 좀 별로다.

- 내 사회적 가치나 주관과 맞는 일이면 좋겠다.


예전에는 내 커리어에 전문성이 없는 것 같아 불만이었는데, 그런 생각은 좀 바뀌었다. 일관성만큼 중요한 게 Connecting dots 하는 것이고 쉽게 숫자로 증명하긴 어렵겠지만 잘 이어가기만 한다면 어떤 분야에서도 잘할 자신은 생겼다.  


이런 고민 와중에 MBA를 염두에 두고 GMAT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목표를 두고 공부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외국에 나가서 똑똑한 사람들과 네트워킹하고 수업도 듣고. 좋기야 좋겠지만, 짜도 아니고 기회비용도 만만찮다. 가치 있는 일일까? 뭔가 커리어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수단으로 MBA를 선택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다른 옵션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데?




옥상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가서 식사를 했다. 평소에 뭐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는지, 한동안 올라가지 않았다. 엄마나 아빠가 토마토가 나왔다, 큰 가지가 달렸다, 꽃이 폈다. 했지만 너무 귀찮아서 하는 수 없이 그래~하고 대답만 하곤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옥상에서 치킨을 먹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캔들까지 켜놓고 치킨을 먹고 있는 사진 속 엄마가 행복해 보였다. 야근만 아니었으면 오늘은 정말로 옥상에 올라가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냈을 텐데. 아차 싶었다. 곧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주말에 내가 요리를 하겠노라고 하며, 오빠와 엄마를 불러 옥상에서 식사를 했다. 취기가 좀 오른 엄마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이것저것 했다. 회사에서 부장님 얘기도 웃으며 들어주는 내가 왜, 엄마한테는 너그럽지 못했을까.


이제 오빠는 곧 결혼도 하니까, 우리 집 옥상과도 이별이다. 얼마 전 유럽으로 길게 여행 간 부모님을 대신 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가 화단에 물을 주었다. 혹시나 어떤 풀만 물을 못 먹을까 봐 꼼꼼하게도 물을 뿌렸다. 그리고 샤워를 했다. 뿌듯함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다. 이 집을 떠나기 전에 이 감정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사귄 지 4년 반 정도가 되었다. 워낙 둘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평소에 대화도 많이 하는 편이라 서로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화를 하다 보면,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 사람에 새로운 면을 계속 발견한다는 게 신기하다. 물론 나 자신조차도 다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남은 당연한 거겠지만.

부모님이 오래 여행을 가시기도 하고 최근에 두 번 정도 평일에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다. 주말에 놀러 가거나 여행 간 적은 있었어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둘 다 퇴근을 하고 만나서 다음날 같이 출근을 하는 것 말이다.


일상이 되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소꿉놀이 같았다. 누가 먼저 화장실을 쓰고, 누가 누구를 깨우고, 바쁘게 준비하는 와중에 서로를 챙기고 하는 것들이.


그는 출근 시간이 빠른 나에 맞추어 일찍 나와서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퇴근 후 집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있는 집으로 퇴근한다는 게 기분 좋았고, 완벽한 일상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햇볕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조금은 그런 느낌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G는 약간 부엉이 타입이고 나는 얼리버드인 편이라서 그와 나는 아침과 밤 간의 에너지 차이가 있다. G는 밤에 좀 더 에너지가 있고 나는 아침에 활동이 좀 더 많다. 이번 기회에 느꼈는데 그 차이가 좋은 것 같다. 서로에게 보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명상

새해 계획을 세우며 상반기에 명상 여행을 가겠노라고 적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키지 못했다. 돈도 없었고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머리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미룬다. 종교도 없는 내가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 말고. 나만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삶의 슬픈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며 사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언제고 나는 쉽게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견고한 사람,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죽기 전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고 싶다. 실존의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 앞의, 하루의 생존만 급급해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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