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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Dec 03. 2018

먼지 낀 하루

18.12.03

퇴근길 셔틀버스에 내려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이미 깜깜했지만 가로등과 상점들에서 비추는 노란 조명등이 뿌옇게 낀 미세먼지에 섞여서 노랗게 느껴졌다.


탁한 흙냄새 위에 미스트 같은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비를 맞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셔틀버스에 타기 전 회사 헬스장에서 머리까지 감고 나온 터라 이 비가 깨끗한 비 일지 걱정이 되었다.


핸드폰을 꺼내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해보니 역시나 빨간색, 나쁨이었다.

가방 속에 우산이 있었지만 둔한 옷을 입은 데다가 무거운 가방에서 필통, 책, 지갑, 먹다 남은 고구마, 운동복 등을 비집고 꺼내는 것이 귀찮았다. 오랜만에 신은 힐도 힘겨웠다.


한 정거장 거리긴 하지만 마침 마을버스가 도착해 있기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마지막 승객 뒤에 섰다. 버스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기사님은 문쪽이 아닌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문을 두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초 뒤 버스는 떠나고 나는 집으로 걸어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한 달만 살 수 있는 대신에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오늘 같은 하루를 보냈을까?'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가장 먼저 이렇게 미세먼지 있는 곳에서는 절대 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맑은 공기와 햇빛을 누리고, 밤 산책까지 즐기고 싶다.


또, 오늘같이 통근 길에 세 시간이나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꼭 가까운 곳에 모여 살 것이다.

그래서 내일이 걱정되거나 체력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오늘 보고 싶은 마음을 참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같이 피트니스센터에서 트레드밀을 뛰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평소에 많이 움직이고 자전거를 타며 바깥공기를 쐴 것이다.

인터넷 쇼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에 들 것 같은 물건을 고르느라 시간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직접 가서 물건을 만져보고 꼭 마음에 드는 것만 살 것이다.

바쁜 아침에 집히는 대로 옷을 입지도 않을 것이다. 그 날 기분에 따라 입고 싶은 옷으로 신중하게 고를 것이다.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고구마를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은 식재료로 골라다가 레시피도 보지 않고 내 맘대로 천천히 음악 들으며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할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아홉 시 반이었다. 내 것인 것 같은 택배 상자가 두 개 정도 쌓여 있었다. 일찍 잠드는 아빠는 이미 잠드셨고, 엄마는 TV를 보고 있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싶고 묻고도 싶은 엄마를 뒤로하고 간단한 귀가 인사만 하고 방문을 닫았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우며 숨을 돌렸다. 그리고 의무감에 TV 내용에 대해서 한 두 마디 엄마와 얘기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나는 여러 잡무를 맡고 있는 팀원을 자원해서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곧 출산을 앞둔 팀원에게 작은 선물도 했다. 책 한 시간 읽고 운동도 한 시간 했다. 봉사 동아리 일도 좀 했다. 내일 수술을 앞둔 지인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알람도 맞춰놨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 같은데도 미세먼지 때문인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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