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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un 01. 2020

기억의 흐름_브레라 (20.03.29)


뭘 먹자고 식당을 정해서 데이트를 게 오랜만이었어. 그날 유독 햇살이 좋고 따뜻한 날씨에 기분이 들떴던 기억이 나. 그날 했던 대화가 생생해. 버티고개역에 온건 처음이라고 언덕을 오를 때부터 설레었었지. 새빨간 가게 아웃테리어를 보니 FIAT의 빨간 자동차가 연상됐어.


바로 식당에 들어가기에 좀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배가 좀 더 꺼졌으면 해서 언덕길을 쭉 따라 올라갔어. 오래전에 지은 것 같은, 고풍스러운 빌라가 많더라고. 사람도 없어서 정말 한적했어. 우리는 마음에 쏙 들어서 버티고개에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어. 집값도 알아보고, 강아지를 키우는 상상까지 해버렸어.

 

부동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언덕이 있는 집, 오래된 집, 빌라는 조심하라고 하던데, 왠지 난 그 세 조합이 끌리기도 해. 볕만 잘 들고 잘 관리된 집이라면 언덕도 좋고 오래된 집도 좋더라고. 그게 더 정이 가.


가게에 들어온 나는 창가 자리에 앉자고 했어. G와 있을 땐 일렬로 앉는 카운터 석이나 이런 창가 자리가 좋더라고. 왠지 대화도 더 잘되는 거 같고, 같은 곳 보는 게 좋아. 점원들도 외국인이고 이태원 주변이라 그런지 손님들도 외국인이 많아서 여행 온 기분도 들었어.


아주 잠시 와인을 마실까 고민했지만 생맥주를 시키고 말았어. 프렌치나 이탈리안 음식을 먹을 때면 와인을 곁들이는 게 더 어울리나 싶지만, 대낮에는 아무래도 맥주가 끌리더라고.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고 싶어서 파리 여행 마지막 식당에서도 고민 끝에 맥주를 시켰었지.

 


처음 나온 메뉴는 라자냐였어. 라자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난데 원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G가 처음으로 내게 요리해 준 음식이기도 해서 더 좋아. (시판 미트 소스랑, 치즈랑, 만두피를 겹겹이 쌓아서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10분 만에 해줬었지.) 브레라의 라자냐는 볼로네제 소스와 최고 조합인 가지가 아낌없이 들어갔고, 짜지 않으면서도 리치 하게 덮은 치즈까지 너무 맛있었어. 이탈리아는 일주일 남짓 여행 갔던 게 전부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훌훌 들어가는 이 요리는 리얼 홈메이드 스타일이라고 느꼈어.



프로슈토가 잔뜩 들어간 이 피자가 나왔을 때, 와인도 한 잔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 같아. 근데 끝나고 에세이 쓰러 가야 했으니까, 한잔으로 족하기.


배부르게 먹고 나온 우리는 그 근처를 배회했어. 공부할 만한 카페를 찾으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 결국 평범한 프랜차이즈에 들어갔지만 통유리창 옆에 앉아서 내내 볕을 쐬며 앉아있던 게 좋았어. 공부를 마치고는 약수역까지 한 정거장을 걸어가면서 방앗간에 온 참새처럼 온갖 가게를 기웃거리면서 다음엔 저기도 가보자 얘기했었어.



 오늘은 퇴근 후에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고 있었어. 기록을 게을리하고 있어서 일기도 사진도 별게 없었거든. 오늘 유독 흐리멍덩한 하루를 보낸 것 같아 선명했던 날들에 대해서 떠올리려 애를 썼어. 근데 두 달 전 브레라를 갔던 날이 생각나더라고. 어떤 생각을 했고 대화를 했는지 세세하게 다 기억이 나더라. 그게 너무 좋아서 글로도 기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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