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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an 06. 2020

오빠의 결혼



2019년 떠나 보내며,  해 동안의 대소사를 뒤돌이켜 보았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지? 연애도 회사도 큰 변화는 없었지만 좀 더 성숙했다는 정도? 대학원 공부도 큰 결심이었는데, 어중띠게 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됐었지. 그리워하던 빠리를 가게 됐고, 제주를 두 번이나 갔었어. 온라인 쇼핑으로 택배를 정말 많이 받았고, 택시도 많이 탄 것 같아. 물론 지금도 왜인지 입을 옷은 없어. 돈을 정말 못 모았어. 인간관계는 음... 만나는 사람만 만났던 것 같네. 그리고 드문드문 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ㅠ
나의 서른살은 건강도 안좋았고, 많이 힘들었는데. 서른 한살엔 그 구렁텅이에어 빠져 나온 것 같아. 스스로 위로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날 위한 시간을 많이 주려고 했던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올해 오빠가 결혼을 했네. 이게 어쩌면 가장 큰 변화일 수도 있겠다. 오빠랑 나는 삼십년 간을 같은 집에서 살았잖아.



난 오빠랑 정말 많이 다르고 안맞는다. 오빠는 까탈스럽고, 논리적이고, 경쟁 체제에 잘 맞는다. 나는 불호가 별로 없고, 직관에 의존하는 편이고, 경쟁도 싫어한다.

난 오빠가 포용력이 낮다고 생각하고, 오빠는 내가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엄마는 오빠에게 항상 높은 수준을 요했고, 내게는 관대했다. 그런 양육 방식이 우리 둘의 차이를 더 극대화 했을지도 모른다.


개인 성격 형성에는 부모 양육방식 만큼이나 형제자매 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오빠는 지금의 내 모습에 무엇을 기여했을까?명 나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을텐데.


우린 항상 싸웠고, 냉전으로 말도 잘 안하고 지낸 적도 있지만 같은 초등, 고등, 대학교를 나온 만큼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건 사실이다.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체육도 잘하고, 유머 감각도 있어서 인기 좋았다. 구들에게 항상 당당하고 솔직한 편이었다. 나내 고민이나 갈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하지 않는 성격으로 친구들과 거리감을 두는 편인 반면에, 오빠는 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생활하는 학교에 내 편이 한 명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안정감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내게 스티커를 붙이며 괴롭힌 윗 학년 남자 학생을 오빠혼내준 적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오빠가 가입한 써클에 내가 빽(?)으로 따라 들어갔고, 뒷산에서 같이 몰래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오빠가 같이 있어서인지 죄 의식을 덜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사춘기를 지나면서 싸움도 줄어들고, 대화도 줄어들었는데, 다시 친해지게 된 계기는 대학교와 군대다.

군대에 들어가더니 부쩍 내게 전화를 걸었다.  매번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를 계기로 다시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학교 수업을 같이 듣기도 했다. 그때 확실히 우리는 공부 스타일도 다름을 깨달았다.

난 남에게 정보를 묻지 않고 혼자 생각하는 스타일인 반면에, 오빠는 지인을 적극 활용한다. 오빠는 계산과 논리로 딱 떨어지는 답을 선호하고, 나는 주관식으로 쓰는 걸 선호했다. 그때는 내 방식이 더 맞다고 생각했지만, 사를 다니면서는 오히려 내가 오빠의 방식을 좀 배웠으면 좋았겠다 여러번 생각했다.


대학 이 후로는 서로 잘 피했기 때문에 싸움 현저하게 줄었고, 나도 속으로는 오빠의 장점을 일부 인정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싸우면 방에 콕 박혀, '왜 쓸데없는 것으로 싸우시지'하며 혼자 속상해하고 회피하며 누구의 편도 못 드는 나와 달리, 오빠는 양측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갈등 상황을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판단해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흐르지 않게 하는 위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성격의 최약점인 부분 오 장점으로 갖고 있는 것 같다. 행운이다.  어린 시절 격렬하게 싸웠던 결과로 많은 걸 깨달으니. 내가 어디에 약하고 강한, 또, 어떤 사람을 만나야 을지.




오빠가 결혼을 했다고 해서 별로 변한 건 없었다. 원래도 집에 잘 붙어있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빈자리가 별로 느껴지진 않았다. 카톡도 있고.


결혼식 날도 순조로웠다. 개혼이지만 부모님도 손님맞이 등으로 분주할 뿐, 딱히 긴장감이나 자식 보내는 슬픔을 내보이시지 않았다. 


나 역시 당연히 덤덤했다. 처음으로 받아본 헤어와 메이크업이 맘에 들지 않은 것에 오히려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하게 긴장한 사람은 주인공인 오빠였다. 빠는 리허설 때부터 병정처럼 굳어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찌 어찌 결혼식이 진행되고 드디어 본식 마지막 순서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나는 인사를 마치고 다시 신부 옆에 자한 오빠의 얼굴을 보았다. 그 표정은 서른 세 살의 오빠가 아니었다.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 여섯  때의 오빠, 아이 였을 때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나도 울컥 눈물이 밀려 나왔다. 머릿 속에서 번뜩 옛날의 기억들이 뜨겁고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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