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런 척했지만 오늘은 정말 우울한 날이다. 안젤라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닉이 나에게 시비 걸고 장난치는 바람에 그 녀석을 붙잡으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뛰다가 안젤라의 의자를 툭 쳤다. 뭐가 골이 난 건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런 나를 붙잡더니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주디, 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네 다리 진짜 두꺼워 보여. 알고 있어?”
안젤라는 엄청난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나에게 속삭여댔다.
나는 울컥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남 이야기를 듣듯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하게 대답했다.
“응, 나도 알아.” 아무렇지 않은 듯 두 눈을 찡긋거리며 말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은 손톱깎이로 살까지 깎인 것처럼 애리고 아팠다.
걱정한 듯하면서도 나를 언제나 만만하게 보는 안젤라가 너무나 미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 애는 우리 반에서 가장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있어서 그런지 패션 센스도 좋고, 키도 크고 무엇보다 다리가 늘씬했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나는 오빠 옷만 중창 물려입고 예쁜 옷도 없고, 날씬한 다리도 아니고, 패션 센스도 영 꽝이었다. 무엇보다 안경… 난 눈이 안 좋아 안경까지 썼다. 나는 내가 너무 못생긴 것 같아 싫었다.
엄마한테 너무 속상해서 내 다리 왜 이렇게 두껍냐고, 나는 턱도 네모나고 못생겼다고 하소연이라도 하면 엄마는 영양가도 없는 말로 나를 위로하곤 하셨다.
“어머, 얘. 다리가 튼튼한 게 얼마나 좋은 줄 아니? 나중에 나이 들어 봐라. 그 튼튼한 다리를 갖지 못한 애들이 부러워할 거야. 그리고 네 얼굴이 얼마나 갸름하고 예쁜데. 보기만 좋구만.”
정말 엄마가 하는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예쁘다고 하는데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나도 눈이 있으니까. 내 주위 친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남자애들은 나에게 관심도 없다. 아니, 관심 없는 게 아니라 못되게 굴었다. 말끝마다 욕을 해 대는 애들도 있고, 내가 혼자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도 시비 걸고 상처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해 대기도 했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이 욕해 주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돌아오는 길 내내 내가 작아졌다. 내가 볼품없어 보여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한 번은, 처음으로 그렇게 대하지 않은 남자애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우산을 안 가져와서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가는 날이었다. 같은 반에 있는 피터라는 남자애였다. 교실에서 앞자리 4번째에 앉은,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애였다. (난 꽤 키가 커서 항상 뒷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그 애는 우산도 안 쓰고 공을 차고 놀면서 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나에게 아는 척 안 할 거란 생각에 나는 그냥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는데,
“주디야, 안녕!”
비를 뚫고 반갑게 나에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나는 4학년 내내 나에게 친절하게 인사하는 남자애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대답했다.
“으… 응… 안녕…!”
그러고는 바로 집으로 뛰어왔다. 저벅저벅 빗길에 뛰어가는 소리와 내 심장도 주룩주룩 쿵쾅쿵쾅 나불댔다. 그리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바보같이 제대로 인사도 못 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내 목소리가 개미만큼 작았고, 비도 와서 더 안 들렸을 텐데…
그 이후부터였다. 그 애가 보였다. 피터라는 애. 축구를 좋아했다.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았고, 무엇보다 친절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친절했을 거다. 다른 녀석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여자애들이나 놀리는 닉이랑은 확연히 달랐다. 그 이후로 남몰래 그 애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조금은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절대 말하진 않을 거다. 왜냐하면 분명 창피만 당할 테니까. 그 애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일이 터졌다. 집에 가려고 복도 계단을 안젤라와 나, 그리고 제니스가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그 애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젤라가 소곤소곤도 아니고, 누가 들으라는 듯이 나에게 말을 했다.
“야, 주디. 얘가 걔지? 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이렇게 화끈거릴 수 있나 싶었다. 아니, 차라리 불에 타 없어지고 싶을 만큼 낯 뜨겁다고 해야 할까. 시간은 정지한 듯 멈춰 섰고, 이내 내 마음에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심과 당혹스러움,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 아…”
그 애의 표정에도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에?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 얼굴로 멀뚱멀뚱 나와 안젤라를 쳐다보고는 그냥 계단을 내려가 버렸으니 말이다. 심지어 애들이 다 지나가는 복도 계단에서 말이다!
옆에서 제니스는 안젤라에게 “야! 그거 비밀이었잖아. 너 의리 없다, 정말!!”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가 미웠다. 지난번에 우리 집에서 셋이 놀 때 서로 ‘비밀 이야기 고백하기’ 게임을 했는데, 안젤라를 믿다니…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당혹스럽고 치욕스럽고 화가 났지만, 부끄러움이 너무 커서 별다른 대꾸도 없이 복도 계단을 한 움큼 내려와 집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다음에 척 아이반을 만나면 안젤라가 너를 좋아한다고 꼭 고래고래 소리 지를 거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 뒤로 며칠간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짖궂은 데 심보까지 고약한 닉이 그 일을 여지없이 놀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애한테 가서 “주디가 너 좋아한대매!!”라고 내가 들리게 말한다든가,
나에게는 “주디, 너 피터 녀석 좋아한대매~ 올래리 꼴래리~” 하며 내 면전에 대고 비아냥댔다.
나는 너무너무 창피해 학교에 차라리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안 가는 곳이 아니란 것쯤은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새 학년이 돼서 피터와도, 닉 그리고 안젤라하고도 다른 반이 되기만을 바라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화끈거리기만 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점심시간마다 캐럴이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전날, 바로 그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왜 쉬는 날이 아닌지, 친구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모두가 이 기분 좋은 날에 들떠 있는데,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 다행인 것은 올해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단 한 번도 그 애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여전히 나는 안경을 쓰고, 두꺼운 다리를 감추려고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안젤라는 여전히 얄밉고, 닉은 계속 장난만 치고 있었다.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가야만 했고, 춥고 건조하며 먼지 많은 교실이 그저 반갑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안젤라는 부모님이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 준다며 들떠 있었다. 그런 반면, 나는 운이 없게도 청소 당번이 되어, 느즈막히 교실을 떠나 집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눈 쌓인 길 위에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애, 피터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뛰어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고민만 하며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그 애가 나를 돌아봤다.
일순간,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걸어가려 했지만,
“주디야! 크리스마스 잘 보내!”
그 애, 피터의 목소리는 맑고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나에게 작은 선물을 툭 쥐어주고,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종이로 포장된 작은 선물 상자였다.
나는 추운 겨울바람에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을 휘감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무슨 용기였는지, 눈 쌓인 길을 터벅터벅 뛰어가 그 애를 붙잡았다.
“피터…!! 고마워! 그리고 크리스마스 잘 보내… 안녕!”
그 애는 작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내 두 손에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 상자가 쥐어져 있었고, 두 볼은 여전히 뜨겁고,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생각했다. 두 볼이 상기된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일 거라고. 헐떡이는 심장은 내달린 두 발 때문이라고.
그렇게 평범할 것 같았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물어 가는 오후, 반짝이는 별빛처럼 그 순간은 미련 없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