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마지막 장에 마침표를 찍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던 내가, 만화만큼은 그렇게도 진지하게 정독하곤 했다. 친구들은 휙휙 빠르게 속독하듯 만화책을 넘기며 읽었지만,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장면 하나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며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도 경건한 자세로 읽었다.
그렇다.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소위 ‘덕질’을 하는 덕후였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방 한켠에 홀로 앉아 만화책을 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재미있고 희열에 찬 일이라 여겼던, 그런 10대 소녀였다.
그런 내가 기억하기로, 만화를 향한 덕질의 첫발을 내디딘 작품은 일본 소년 만화 원작인 <바람의 검심>(1999)이었다. 잔인한 과거를 잊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히무라 켄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 작품으로, 친오빠를 통해 입문하게 되었다. 주인공 켄신은 얼굴 한쪽에 X자 흉터를 가진 인물로, 겉보기엔 순진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에 새로운 역사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발도재’였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한 검놀림으로 적을 단숨에 제압하던 그는, 매 회차 새로운 에피소드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오래도록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만화책으로 <바람의 검심>을 읽고 있던 어느 날, 오빠가 어떤 경로로 애니메이션 자막판을 다운로드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으로 활자를 읽던 만화 속 주인공을 영상으로 접한 나는,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덕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한층 더 심취하게 되는 대단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바람의 검심: 추억편>이었다.
이 추억편은 주인공 켄신이 어떻게 X자 흉터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숨기고자 했던 과거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이야기였다. 첫 장면부터 기존 TV 시리즈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스산한 음악, 모노톤의 아늑한 영상, 그리고 한 소년을 지키기 위해 연약한 여성들의 목덜미에 칼이 꽂히는 충격적인 장면이 이어졌다. 여성들이 지키려 했던 붉은 머리의 소년이 바로 켄신이었고, 그는 미래의 스승이자 검객의 손에 구출되어 검술을 배우게 된다.
그는 누구보다 강한 검술을 익히고, 나라의 새 시대를 위해 대의를 명분 삼아 살인을 감행하는 검객이 된다. 이는 일종의 과거 막부 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과 함께 검을 휘두른다.
내가 이 ‘추억편’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드는 켄신보다, 원래 대의를 위해 살생을 서슴지 않던 잔인한 검객이자 신비로운 ‘발도재’로서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철없는 관객이었을까. 어둠을 품은 슬픈 과거를 직접 보여주는 서사의 강렬함이 깊이 박혔다.
두 번째는, 여자주인공 토모에와의 사랑 이야기였다. 켄신은 수많은 ‘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베며 다녔고, 그 과정에서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바로 토모에였다. 그녀는 신분을 위장해 켄신에게 접근하고, 그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적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두 사람은 부부인 척 살아가게 된다. 이때 켄신은 그녀가 자신이 죽인 약혼자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토모에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켄신을 죽이려 하지만,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마지막엔 켄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임을 당한다. 그녀는 말이 없고 웃지도 않으며,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암울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서글프고 아름다워 더욱 무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딘가 보호해 주고 싶어지는 가련한 느낌이랄까. 10대의 나는 그 역할에 이상하게도 매료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오죽하면 나의 이메일 아이디가 ‘t**moe’였겠는가. 그녀의 이름과 내 성을 따서 만든 그 아이디 하나로, 내가 얼마나 깊게 빠졌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몇 년 전, <바람의 검심> 극장판 실사화가 OTT 서비스를 통해 공개되었을 때, 의리삼아 봤지만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나는 코스프레를 좋아하지 않았고(실사화는 어쩐지 정이 안 간다), 오타쿠로 넘어갈 정도의 덕질은 중학생 때 졸업했기에 더 이상 그런 방식의 감상은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검심>은 내 첫 덕질의 문을 열어주었고, 이후에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덕질의 여정을 이어가게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누야샤>(1996) 전편과 극장판을 모두 섭렵했고, 틀어놓을 것이 없을 땐 배경처럼 다시 보곤 했다. <명탐정 코난>(1996), <에반게리온>(1995), <몬스터>(1994), <사무라이 참프루>(2004) 등도 꾸준히 사랑하며 일본 만화의 세계를 헤매고 다녔다.
일본 만화의 세계관은 마블 못지않게 방대하고 독특하다. 대체로 심오한 편이고, 그 심오함을 전달하려는 강박까지 느껴질 정도로 세계관 형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쓸데없이 각 잡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는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이면 유치함조차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된다.
근래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은 <진격의 거인>(2003)도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이제 더 이상 일본 만화를 즐겨 보진 않는다. 가끔 남편이 <진격의 거인>을 볼 때 “너무 기괴하다. 내 스타일은 아니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결국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고, 영화과를 졸업한 오빠의 영향으로 중·고등학생 시절부터는 만화 대신 비디오 가게로 발길을 돌리게 되면서, 나의 만화 덕질은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OTT를 통해 과거 빠져 있던 일본 만화가 추천 목록에 올라올 때면, 아주 잠깐 옛 추억에 젖곤 한다. 누구보다 집요했고, 집중했으며, 일본 사이트에 어렵게 접속해 이미지를 출력하고 문방구에 가서 코팅까지 했던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무언가에 덕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대상이 무엇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과거를 떠올리며 아주 잠깐 설레 본다. 새로운 덕질의 미래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