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트레스 받을때 쿠키를 만든다

나를 위한 육아에세이

by 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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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받으면 쿠키가 만들고 싶어진다. 만든 결과물의 퀄리티와는 상관없이, 그저 만들기 자체와 그 결과물을 기다리며 먹는 행위를 즐긴다. 오븐에서 달큰하게 구워지는 노릇한 외피, 열에 의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시간이 설렌다. 또, 만들어진 그것을 먹는 행위가 적지 않은 만족감을 준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이다. 이유는 맛에 있다. 최대한 밀가루를 쓰지 않으려고 하고, 설탕이 아닌 대체당을 사용해 시중에 파는 달콤한 쿠키와는 현저히 떨어지는 ‘건강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맛있게 만들어지는 쿠키도 있는 반면, 너무 건강한 맛을 내어 손이 잘 가지 않아 몇 개 먹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방치돼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쿠키의 목적은 오직 ‘만들고, 그 과정을 기다리는 데’ 의의가 있다.

마치 필름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볼 수 없는 불편함에도, 어떻게 찍혔는지 모를 결과물을 기다리는 데서 오는 맛이라면 비슷할까.


쿠키를 만드는 것은 먹는 자체의 행복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손으로 만드는 과정의 수고로움을 즐기는 데서 만족감을 준다. 쿠키를 성형할때(모양을 만드는걸 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는 것처럼, 내가 쿠키의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마치 영화 버닝에서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벤이 요리에 대해 언급한 대사처럼 말이다.


“내가 왜 음식을 만드는지 알아?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먹는다는 거지.
마치 신이 제물을 받는 것처럼. 일종의 메타포지.”


벤이 말하는 요리에 대한 논리는 내가 하는 베이킹과는 접근이 조금 다르지만, 우리 둘 다 ‘만들어서 직접 먹는다’는 의미적 행위의 메타포는 동일하다.


나에게 집에서 가장 친숙하게 들어가는 장소가 부엌이고, 늘상 요리를 함에도 다른 어떤 요리도 나에게 기대감을 주지 않는데, 유독 쿠키만은 나에게 기분 좋은 기대감을 준다. 아마 이 ‘쿠키 만들기’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의 통제권 하에, 일사불란하게 조절되기 때문일 것이다.

원하는 맛을 내려면 미리 선택된 재료를 준비하고, 계량기를 통해 그램 수를 정확히 확인해 가루류와 버터 또는 오일 등을 섞는다. 무엇보다 성격 급한 나에게 ‘기다리는 별도의 시간’ 없이도 바로 오븐에 구울 수 있다는 손쉬운 방법까지. 내가 원하는 레시피를 선택해 만들어내는 통제권을 손에 쥔 그 맛, 그리고 그것을 나를 위해 먹는 것. 이것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쿠키를 만들고 싶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먹는다”고 무심한 듯 약간의 미소를 띠며 말하는 벤의 모습은 섬뜩하지만,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이유는 나의 삶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신도 개입하길 원치 않는 ‘나만의 영역’이 있길 바랐던, 내 안의 고립된 욕망은 아니었을까.

철저히 자신의 통제권 안에서 요리를 해내고, 내가 원하는 대상이나 혹은 나 자신에게 그 요리를 먹인다는 행위. 마치 신인 ‘내’가 제물을 먹는 것처럼,“내가 만든 요리를 내가 먹는다.”라는 점이 내가 쿠키를 만드는 무언의 이유일 수 있겠다.


물론 벤과 나는 서로 맞물릴 수 없는 방향으로 ‘만들기’를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든 것을 스스로 (자유롭게) 먹는다는 행위만큼은 동일하다.

그러니까 쿠키는 내가 가질 수 없지만, 갖고자 하는 시간과 욕망이다. 이기적인 만족감의 표출이다.

아이를 위해서도, 남편을 위해서도 아닌, 온전히 나만의 것. 소.확.행이다.

나의 주방에서, 나의 오븐기로, 나의 재료를 통해 먹고, 버리거나 내 입에 넣어도 되는 아주 작은 욕망 말이다.


“쿠키 만들기”라는 사랑스러운 행위 뒤에 감추어진,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위 행위.

그러니까 나에게 “쿠키 만들기”는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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