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대나무숲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G G Nov 13. 2023

내 팔자에 고기는 무슨

하염없이 밖에서 김치를 기다리다

나는 지금 40분째 밖에서 김치를 태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

.

.

.

오늘 점심을 먹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아 옛날엔 이랬었는데..' 하는 라떼 이야기를 한참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 아빠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온갖 추억을 꺼내보다가 문득 우리 신혼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우리 거기 갔었잖아~ 중국 리장, 샹그릴라, 상하이."

"근데 잘 기억이 안 나. 그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아버님이 가라고 해서 그냥 갔지."

남편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만 나의 뜨문뜨문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꽤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야크 고기 먹었던 거, 꿀벌 볶음, 설산에 올라갔던 기억 등...

그리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아이에게 말해줬다.

"야 그때에 고모가 우리 신혼여행 따라갔었잖아. 결혼도 하기 전인데 아버님 어머님이 이미 그렇게 결정 내려놓고 비행기 티켓이며 호텔까지 다 끊어놓은 터라 내가 싫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 이상하고 싫었지만 그냥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지..."

아이가 묻는다.

"근데 고모는 신혼여행에는 왜 따라갔어?"

"그러게.. 에휴.. 그냥 아주 철이 없었어..."

남편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있던 사실이니까... 시댁식구들 디스를 이어나가며 아이들에게 폭로했다. (친정 식구들은 나의 이런 과거를, 시누이의 철없는 만행을 모른다…)

남편 왈, 자기가 주도권이 없었던 때라 아무 말도 못 했다고...

그랬다. 우리가 연애를 7년이나 하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학교생활이 길어서 직장을 가진 지 3달 만에 결혼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원래는 가을이었던 일정이 시댁 일정에 맞춰 갑자기 6개월이나 단축되어서 그냥 어머님이 데리고 다니는 대로, 아버님이 준비하는 대로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한의사 집안에 시집간다고, 잘 간다고 부러워했던 결혼이었는데 당시에 시어머님은 교사인 나를 못마땅해했었던 것 같다. 여기에만 털어놓지만 우리 집에서도 신경 쓴다고 신경을 써서 예물을 현금으로 3천이나 했는데(우리집에선 엄청 큰 액수다.) 암튼 얼마나 우리 집안이 못마땅하고 내가 싫었으면 신혼여행인데 굳이 시누이를 끼워 보냈을까. 여행 한번도 못가본 집안도 아닌데. 헐.


하지만 다행히 결혼 후 2년 안에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남편이 독립적으로 한의원을 개원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우리가 알아보고, 우리 능력으로 해낸 것이다. 당시 시부모님은 당신들께서 알아봐 준 지방 자리에 한의원을 거절했다며, 부모와 상의 없이 한의원을 차렸다며 호통을 치시고, 우리와 거의 몇 개월 연을 끊은 적도 있었다. 개원식 할 때 오지 않으신 것은 물론이며 관계가 최악인 시절 첫째를 임신하여 가까스로 관계 회복에 애를 썼지만 첫째를 낳고 산후조리하고 나왔을 때에도 오셔서는 그냥 미역이랑 고기만 덩그런히 놓고가셨던.. 그게 아직도 너무 섭섭하다. 그 이후  아이에게 잘해주고, 용돈 주고 하실 때는 속으로 '그때 미역국도 없이 서운하게 하셨던 거 지금이라도 아이에게 풀어주셔요' 하고 생각하곤 한다.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암튼. 그렇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며느리였는데 남편이 개원을 하고 점점 성장을 하면서 알을 깨고 부모님이라는 둥지를 벗어나자 그제야 조금씩 어른 대접을 해주신다.



오늘은 저녁 6시에 가까운 이모님 댁 내외와 맛있는 소고기 곱창을 먹을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 전화가 와서는 지금 막 김치를 담갔는데 고속버스 편에 보낼 테니 터미널에서 받아라 하시는 거다. 버스 도착 시간은 약 7시.

하필이면 남편이 밖에 나가 있어 전화가 안 될 때라 내가 직접 “저희 저녁 약속 있어요” 는 말했지만 오늘은 받기 힘들어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는 못하고는 이따 사정 봐서 다시 전화드릴게요라고만 말씀드렸더니 남편과 전화가 안 되는 사이에 이미 버스에 김치를 태워 보내셨다고 시간 맞춰 일찍 가서 기다리라는 연락.


그런데 버스 기사 왈 차가 안 막히면 20분 더 일찍 올 수도 있다고 해서 길가에 있는 중간 버스터미널에 원래 도착 예정시간보다 20분 일찍 나가 있었다. 6시 40분까지 미리 나와있기 위해 나는 식당에서 잠시 얼굴만 뵙고 물 한잔, 고기 두어첨 먹고 나와야 했다.

결국 버스는 차가 많이 막혀 도착 예정시간 보다 20여분이나 더 늦게 도착했고, 그 덕에 20여분 일찍 나가 기다리고 있던 나는 40여분을 밖에서 덜덜 떨며 서 있어야 했다는…

에휴 내 팔자에 고기는 무슨...  

하며 애써 나를 달랬지만 서운한 건 서운하다.


이 서운함은 내가 고기를 못 먹어서가 아니다.

남편이 아니고 내가 나와 기다리게 되서도 더더욱 아니다.

그놈의 김치가 뭐가 그리 급하다고… 나나, 남편이나 맘 편하게 저녁을 먹지 못하게 하시는 마음이 이해가 안 된다. 우린 분명히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말이다. 약속장소에서 버스터미널까지 가려면 누구라도 저녁은 못먹게 된다는것을 모르셨을리 만무하다. 그런 건 귀에 안 들어오시는건가? 우리 사정이란 아예 없는건가?


김치는 무사히 잘 받았으나, 마음이 편치않고 보니 그리 반갑지 않았다.

감사해야 하는게 맞는데  '왜 꼭 지금~?' 하는 속상함이 먼저 올라온다.




예전에 친정엄마와 둘이 여행을 갔을 때에도 돌아오는 날 굳이 전화해서는 시누이 부동산 일로 나더러 와야 한다며 일찍 오라고.. 그렇게 며느리의 마음 불편하게 만드셨던 시어머니. 결국 엄마와 더 있고 싶은 내 마음은 엄마를 바삐 보내야 하는 매정한 딸이 되어야 했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갔지만 그때도 내가 친정엄마와 여행 간 것을 다 아시면서도 내 사정은 안중에도 없으셨단 걸 잘 안다.

 


에힝... 나는 그런 어른 되지 말아야지.  오늘따라 시금치도 먹기 싫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