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이세카이의 용사님

by 위댛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 꿈이라면 몸을 움찔하며 잠에서 깨어났겠지만 굉장히 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카롭고 단단한 감각이 엉덩이에 감지되는 느낌이랄까? 엉덩이를 들자 누군가 깔려있었다. 보라색 피부와 뿔을 가지고 있는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닌가?


"용사님, 악마를 물리치셨군요! 정말 굉장해요!"

고개를 들자 큰 키와 작은 얼굴, 금발머리와 뾰족 귀를 가진 여성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깔아뭉개버린 것이 악마라면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엘프 이리라. 엘프라니, 너무 진부한 거 아닌가. 그래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엘프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야 이거 리얼하네.


엘프는 자신의 이름이 린이라고 했다. 린은 악마에게 붙잡혀 갈 뻔했으나, 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린은 가녀린 팔로 쓰러져있던 악마를 번쩍 들어 올려 한쪽 옆구리에 끼웠다. 동작이 경쾌하고 산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이제야 가상현실 같군!


린은 은혜를 갚고 싶다 말했다. 눈앞에 시스템창이 생성됐다.


튜토리얼 퀘스트 완료 : 린을 구해라. /보상: 린의 호감도 +1, 엘프의 저녁식사

새로운 퀘스트: 린과의 저녁식사.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


식사를 수락하자 눈앞에 내비게이션 화살표가 생성되었다. 나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초대받는 입장에 앞장을 서는 게 맞나 싶어 걸음을 멈추고 린을 돌아보면 그녀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쩔 수 없이 초행길을 앞장서 걸었다.


린은 엘프의 숲에 살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는 린과 비슷한 외모의 npc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들은 린을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순식간에 엘프 공주를 구한 용사가 된 것이다. 마을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수많은 엘프들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준비한 성대한 보상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현실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엘프들은 모닥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쌓았다. 그들은 장작을 하나 쌓아 올릴 때마다 그것에 입맞춤했다. 그리고 린이 들고 온 악마를 긴 막대기에 매달아 세웠다. 그들은 돌아가며 악마에게 침을 뱉었다. 악마를 화장하거나 정화해주는 의식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눈앞에 선택지가 생성되었다.

-팔 / -다리 / -가슴 / -복부 / -머리 / -특수부위

스텟 분배를 하는 건가? 나는 다리를 선택했다.

엘프 요리사는 악마의 허벅지를 얇게 저며 접시에 올린 뒤 내게 건넸다.


린이 말하기를, 엘프들은 숲의 야생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세계에는 동물 말고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게 바로 그건가? 문화의 다양성? 특수성이었던가? 이건 틀린 걸까 다른 걸까? 나는 머리가 아픈데, 린은 그저 웃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나만 너무 심각한가? 나의 행동이 이들에게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건 단지 게임일 뿐인데. 그저 게임 아이템을 섭취, 아니 사용하는 행위일 뿐이잖아. 게다가 저놈은 나쁜 놈이고. 사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엘프들이었다. 수많은 엘프들이 은밀하게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순간 나를 저 악마 옆에 세워둘 것 같았다.


그래, 이건 자색 군고구마 슬라이스다. 나는 자색 군고구마 슬라이스를 한 점 들어 입에 넣고 씹었다. 내 입에서 느껴지는 것은 고기의 식감과 향이었다. 모든 엘프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엄지를 들었다. 엘프들이 환호성을 지르더니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자색고구마에 포도주. 깔맞춤이네! 너희는 미적 감각이 있구나! 무슨 소리를 해도 엘프들은 웃어주었다. 나는 공주를 구한 용사니까!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해가 쨍쨍했지만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아직까지 축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눈 앞이 흐릿했다. 눈이 부은 건가? 나는 눈을 비비며 매뉴얼에서 읽었던 것들을 떠올려봤다. 이세계에서의 하루는 현실 세계에서 1시간이라고 했던가. 로그아웃 설정을 2시간으로 해두었으니 아직 하루가 더 남아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까지 가야 하다니, 쓸데없이 리얼하잖아. 하지만 나는 곧 어떤 것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반투명하면서 말랑하고 동시에 단단한 느낌을 주는 이상한 물체였다. 내가 강한 타격을 주면 그것은 충격을 흡수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결계? 마법진? 마법 비눗방울? 슬라임? 용의 콧물? 이건 대체 뭐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군가 나를 가뒀다는 것이다. 밖을 보기 위해 그것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천천히 얼굴을 밖으로 내밀자 그것이 늘어나 조금씩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대한 나무 위에 있었고, 내 밑에 있는 엘프들은 새로운 누군가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린이 그를 소개했다.

"악마로부터 저를 구해주신 용사님입니다!"

엘프들이 환호했다. 공주라는 작자가 왜 항상 혼자 돌아다니다 악마한테 붙잡히는 걸까? 그리고 악마의 정체는 뭘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 온 용사였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좋았다. 이 게임은 커스터마이징 기능 없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아바타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는 실제 세계에서도 키가 크고 멋있을 것이다. 엘프들이 달려들어 그를 감쌌다. 팔짱을 껴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곤란해하는 듯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나한테는 저렇게 하지 않았잖아? 사람 차별하는 거야? 그리고 저긴 내 자리야.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나는 나가기 위해 발버둥 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갑자기 손끝이 창백해지더니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부족한 탓일까?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소리쳤다.



"내가 용사라고!"



출처: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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