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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Jan 17. 2021

[그빵사]74. 모카 롤 케이크

집 안 한 공간에서 삶을 배운다.

ㅣ[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오늘은 또 뭐하지? 아침을 먹고 난 뒤 언니와 방 안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홈런볼 만들어줘." "놉. 크림을 넣는 게 어려워."

"그럼 피자빵." "놉. 재료가 없어."

"...그럼 모카 생크림 빵은?"


듣자마자 커피 향이 가득 피어오르는 부엌이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되도록 제빵은 피하고 싶었고 그동안 시도했던 모카번, 모카빵, 모카 생크림 카스테라를 제외한 또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모카 생크림' 이란 단어로 검색해보자 다양한 레시피 중에 모카 롤 케이크가 눈에 띄었다. 롤 케이크는 또 내 전문(?)이지! 그동안 너무 어려웠던 솔티 캐러멜 롤케이크만 주야장천 만드느라 모카 롤 케이크는 상대적으로 쉬워 보였다. 언니가 원하는 모카 생크림과 엄마가 좋아하는 롤 케이크라니! 두 명의 니즈를 한 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메뉴였다.


앞치마를 입은 뒤 바로 서랍에서 재료와 롤케이크 팬을 꺼내와서 팬에 맞게 유산지를 맞춰 자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유산지 자르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귀찮더니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금방금방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했다. 이제 계란 3개를 꺼내와서 롤시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나의 보울에 노른자와 흰자를 모두 함께 넣고 설탕을 넣고 휘핑하는데 이 방법을 '공립법'이라고 한다. 공립법을 안 뒤에는 롤 시트를 만드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참고로 롤시트를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따로 휘핑해서 섞는 별립법과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노른자와 흰자를 한꺼번에 섞는 공립법이 있다. 하나라도 공정이 더 들어간 별립법이 더 견고한 반죽이 나와 높이감도 높게 나온다고 한다는데 두 개를 따로 휘핑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핸드믹서 날은 하나인데 노른자 휘핑하고 닦고 다시 흰자 휘핑하고 닦고 생크림도 휘핑해야 한다. 초반에 롤케이크를 만들 때는 별립법밖에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공립법을 알게 된 후로 롤 케이크를 자주 만들게 되었다. 홈베이킹 세계에서 하나의 보울만을 사용해서 베이킹하는 '원 볼 베이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내가 특별히 귀찮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음에 위안을 삼았다.


그다음엔 우유랑 버터를 넣고 녹인 것에 인스턴트커피가루를 넣고 섞은 것에다가 하얗고 풍성하게 올라온 계란 반죽을 한 움큼 떠서 먼저 섞고 난 뒤 본 반죽에다가 섞는 과정을 해야 한다. 나는 처음 이 과정을 접했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다른 성질을 가진 재료를 한 번에 섞으려고 하면 오히려 분리되기도 하는데 미리 조금 섞은 다음에 전체적으로 섞어주면 거부감 없이 잘 섞이는 과정이 유독 신선했다. 갑자기 지난번 허브 ‘타임’을 길렀을 때가 떠올랐다. 솜 발아를 해서 틔운 새싹을 화분에 옮겨 심자마자 바로 죽어버리고 나서 그제야 홈페이지에 들어가 키우는 방법을 자세히 읽어보니 지피 펠렛이라는 씨앗 파종용 흙에다가 발아시킨 후에 그대로 화분에다가 옮겨심으면 잘 자란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내가 첫 홈베이킹을 시작하게 되었던 때가 떠오른다. 전혀 모르던 미지의 세계였던 홈베이킹을 그냥 바로 해보려고 했으면 아마 지금까지 시작도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시작하기 전에 원데이 클래스로 베이킹의 세계에 살짝 발을 담가보니까 그것이 베이킹 세계의 입문하는 문이 되었던 것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성질의 재료들을 먼저 섞는 과정과 비슷해 보였다. 이렇게 가끔 삶의 어떤 한 부분이 베이킹 과정과 겹치는 걸 볼 때면 사람을 만나는 것만이,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만이 인생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유일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 안 한 공간에서도 삶을 배울 수 있다.


오븐에서 나온 롤시트 위에 커피액을 넣어 휘핑한 크림을 듬뿍 바른 다음 돌돌돌 말아서 유산지로 감싼 뒤 냉장고에서 굳혀주었다. 그 사이 점심으로 아빠의 필살기 메뉴인 랍스터 갈릭 버터 구이를 오랜만에 먹고 바로 나의 모카 롤 케이크도 커피와 함께 먹기로 했다. 커피 크림이 생각보다 씁쓸해서(캐러멜 탄 것에서 나는 씁쓸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느끼할 수도 있는 휘핑크림을 잡아주어 깔끔한 맛이 났다. 밤늦게 온다던 눈도 그 사이 잠깐 내려서 풍경도 좋았다. 오늘은 아빠와 막내딸의 필살기 메뉴로 가득 찬 점심이었다며 가족 모두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롤케이크가 나의 필살기 메뉴가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베이킹 처음 시작할 땐 상큼한 레몬 케이크를 내 필살기 메뉴로 만들겠다고 부단히도 노력했는데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레몬 케이크는 몇 번 만들어보지도 못했다. 하다 보니 의외로 잘 맞은 롤케이크가 레몬 케이크 대신 나의 필살기 베이킹이 되었다. 가족들이 매우 좋아해 주는 것은 물론 적당히 어려워서 재밌으면서도 적당히 쉽고, 들인 노력에 비해 그럴싸한 비주얼과 함께 크림이 가득하니 한번 먹어도 든든하게 먹는 것 같은 효과까지! 이런 이유에서 자주 해 먹게 되고 실력도 쌓이면서 필살기 메뉴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전문가에 비해선 턱도 없는 실력이다. 하하) 필살기 메뉴가 된 롤케이를 보면서 정말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나도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언제나 상상처럼 모든 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걸 발견할 수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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