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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Jan 25. 2021

[그빵사] 82. 나 이제 뭐하지

베이킹 대신 영화 '줄리&줄리아'를 보았다.

[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새벽까지 일을 다 마치고 점심시간에 가까운 아침에 눈을 떴다. 가족들 모두 출근 혹은 산책을 나간 뒤라 집이 조용했다. 뭔가 출출하기는 한데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고 부엌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다가 엊그제 만든 손바닥만 한 초코칩 쿠키를 접시에 하나 담아서 네스프레소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뽑아 소파에 앉았다.


'나 이제 뭐하지'


일이 겨우 오늘 새벽에 끝났을 뿐인데 후련함을 만끽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분 전환을 할 겸 오늘의 '그빵사'를 쓰기 위해 베이킹을 해볼까 하다가 브레드 박스에 남아있는 초코칩 쿠키와 냉장고에 있는 바나나 푸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벌써 며칠 째 연달아서 스모어 쿠키, 롤케이크, 애플파이 등 아주 달디 단 디저트만 만들어 입에 넣으니 온 몸이 설탕을 거부하는 듯했다. 위장도 좀 쉬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소파에 그대로 누워서 티비로 넷플릭스를 켰다. 보고 있던 미드를 재생했는데 꿈꾸던 일을 시작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던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만 몇 화째 진행 중이었다. 사랑이야기야 좋긴 하다만 지금은 별로 끌리 지가 않아 끄고 검색창에 '빵' '베이커리' 등으로 검색을 해보다가 영화 '줄리&줄리아'를 발견했다. 이미 몇 번 봤던 영화였지만 포스터를 보니 또다시 보고 싶어서 영화를 재생했다. 참고로 영화 '줄리&줄리아'는 줄리라는 여성이 수십 년 전에 줄리아가 쓴 프랑스 요리 책의 524가지 레시피를 365일 동안 도전하는 것을 블로그에 적는 이야기 이이다. 영화를 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여자 주인공인 줄리 대사가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직장 일은 예측불허잖아. 무슨 일 생길지 짐작도 못하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마음이 편해."


내가 베이킹을 지속하게 된 이유와 비슷했다. 물론 매번 다른 레시피를 도전하기 때문에 오븐에 넣는 순간 마음이 편하다기보다는 어떻게 나올까 설렘 반 걱정 반 두근거리기 때문에 이 대사를 100% 공감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나에게 베이킹의 매력은 이 대사처럼 예측이 가능하고 결과물이 확실한 것이었다. 딱히 디저트가 너무너무 좋다기보다는 만드는 행위 자체가 좋았다. 그렇다고 영화 속 줄리처럼 몇 백가지 레시피를 도전해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줄리아처럼 요리학교를 다니며 베이킹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줄곧 '나는 어느 쪽이지?'라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오후 4시가 되었다. 하루 종일 쿠키 1/3 조각에 커피 한 잔만 마셨더니 결국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야 말았다. 영 당기지 않았던 어제저녁에 가족들과 먹고 남은 청국장을 보니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아주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위장이 다 비워지면 먹고 싶은 게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다음에 뭐할지는 모든 게 끝난 후에 떠오르지 않을까? 아직 나에겐 일의 '진짜_완전 최종_진짜 마지막. jpg'  단계도 남아있고 아직 그빵사를 쓸 날도 *14일이나 남아있는 것이다. (*컨셉트진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로 '그빵사'를 연재하고 있다.) 마치 엊그제와 어제 만들고 남은 바나나 푸딩과 쿠키 몇 개 같이 말이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다. 계속 그래 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마무리를 잘해보겠노라고, 너무 조바심 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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