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계 레벨업!
[그냥 빵을 사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초보 홈 베이커의 빵 만들며 드는 생각들
베이킹을 열 번 정도 하고 나니까 기본 적으로 아는 디저트 종류는 다 만들어 본 것 같다. 마들렌, 레몬 케이크, 티라미수, 퐁당 오 쇼콜라, 머랭 쿠키 등등.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어서 언니에게 새롭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크림 가득 들어간 슈크림 먹고 싶어."
동글동글한 과자 안에 노란색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 들어간 슈크림이라... 이걸 홈베이킹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건가? 일단 한 번 영상을 찾아보니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모양이다. 다만 슈크림의 관건은 겉면이 바삭한 슈를 만드는 것인 것인데 댓글을 보니까 반죽이 부풀어 오르지 않은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베이킹과는 달리 레벨이 높아 보여 잠시 생각할 시간을 두기로 했다.
다른 일로 언니랑 함께 마트를 갔던 날 언니는 내 마음은 모르고 슈크림 만드는 데 필요한 생크림은 물론 무염버터도 두 개나 사줬다. 대충 까먹은 척하며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젠 피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마트를 나서며 "맛있게 만들어줄게"라고 말한 지 2주가 지났다. 언니가 사준 생크림도 다른 베이킹에 써버렸다. 언니는 가끔씩 슈크림 언제 해줄 거야?라고 묻기 시작했고 이미 받은 게 있기 때문에 만들어 볼게 라고 대답을 하면서 슈에 크림을 넣을 도구가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속 미뤘다.
나의 이런 회피성 성격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종종 고개를 드러낸다. 그렇게 계속 꾸물 적대고 있을 때 2020년 들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뱉은 말 지키기'. 반대로 말해서 '빈말하지 않기'인데 좀 더 진중한 성격이 되고 싶어서 정했다. 이 다짐을 다시 떠올리면서 해주겠다고 했으면 해 보자! 라며 근처 베이킹 재료상에 가서 크림을 넣을 뾰족한 깍지를 구매하고 생크림도 새로 사 왔다.
다음날 먼저 커스터드 크림이 될 계란 노른자에 여러 재료들을 섞어서 약불에서 끓인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본격적으로 슈가 될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븐 팬 위에 짤주머니로 동글게 반죽을 짠 뒤에 분무기로 물을 잔뜩 뿌려주면 슈가 잘 부풀어 오른다고 했다. 반죽에 물을 뿌린 건 처음이라서 어떻게 될까 너무 궁금했다. 오븐에 들어간 노란색의 동그란 반죽은 몇 분이 지나자 통통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위로 부풀어올랐다. 뱅글뱅글 돌려 올린 부분이 벌어지면서 내가 알던 슈의 모습이 보였다.
슈를 오븐에서 꺼내 식히는 사이 처음에 만들었던 커스터드 크림이 될 노른자 반죽을 냉장고에서 가져와서 생크림과 설탕을 넣고 핸드믹서로 섞어 주어서 크림을 만들었다. 그다음엔 슈에 크림을 넣는 작업 후 냉장고에서 2시간 정도 크림을 차갑게 만든 뒤 꺼내서 먹으면 정말 진하고 맛있는 커스터드 슈크림이 완성이 된다.
슈크림을 반을 쪼개 한 입 먹으면서 하마터면 슈가 부풀어 오르는 귀여운 장면과 이렇게 맛있는 슈크림을 먹을 기회를 놓칠 뻔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회피성 성격을 더 많이 마주하고 인식하며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한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작은 것이더라도 하겠다고 한 말을 지켰을 때 나의 자존감이 그 어떠한 방법보다 쑥쑥 올라간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