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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복절 역사를 한눈에 담은 《우리들의 광복절》

광복 그 순간부터 광복절 80년 사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광복절까지

by 곽한솔

마침내 광복 80주년 광복절이 속한 8월입니다. 광복절이 임박하자 전국 곳곳에서 더욱 다채로운 주제의 행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광복절이 지나서도마찬마찬가지인데요. 특히 전시가 많이 펼쳐지고 있는데요.

저는 광복 80년 서포터즈 “YOUNG:光”으로서 광복 관련 전시 현장을 많은 국민 여러분들에게 생생히 전달하고자 거주하고 있는 서울에서 진행 중인 두 곳의 전시 현장을 지난달 찾은 바 있습니다. 중구 소재 남산골한옥마을 전통공예관 특별 전시 <우리들의 태극기>와 중랑구 소재 망우역사공원 중랑망우공간 기획 전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인데요.

<우리들의 태극기> 전시실 및 포스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전시실 및 포스터

위 전시들이 제 기대 이상으로 유익하여 감명 깊었고, 이러한 전시들을 더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현재 진행 중인 많은 광복 관련 전시 중 어디에 가볼까 물색해 보았답니다. 선정 기준은 위 두 전시 주제 및 전시장 소재지가 겹치지 않으면서도 전시 기간이 앞으로 많이 남아 있는 전시로, 어렵지 않게 한 전시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종로구 소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8월 5일부터 약 세 달간 진행되는 광복 80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광복절> 전시인데요. 택한 이유가 비단 소재지나 주제가 겹치지 않아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광복의 그날과 80년 동안 진행된 그동안의 광복절 기념사, 광복(절)과 관련된 다채로운 전시물을 볼 수 있다는 전시 내용이 제 마음을 확 사로잡았기 때문에 꼭 가야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광복절> 포스터

이제 막 시작한 전시여서 제가 현장 후기를 들려드리면 전시가 끝나는 11월 9일까지 많은 분들께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전시 시작 주간 주말에 바로 현장을 찾았습니다. 평일에 가기 힘든 직장인 분들께서는 평일에 21시까지 연장 운영하니 20시 30분까지 도착하신다면 전시 관람할 수 있다는 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전시기간 : 2025. 8. 5. ~ 2025. 11. 9.

전시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B

관람시간 : 09:00~18:00(입장마감 : 17:30)

※ 매주 월요일은 휴무, 금요일은 21시까지 연장 운영


서울역사박물관은 바로 큰길 건너에 정동 거리가 있고, 광화문과 경복궁∙덕수궁 등 명소 및 서울 도심과 인접하기에 이와 연계하여 방문하기 참 좋은데요. 박물관 내에서만도 상설 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어린이학습실, 서울역사자료실, 기증유물 전시실 등 전시 공간과 뮤지엄숍과 카페까지 다양한 볼거리 및 쉼의 공간이 있어 사실 이곳에서만도 몇 시간을 거뜬히 보낼 수 있답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님이라면 아이들과 시간 보내기에 특히 안성맞춤이라는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건물 전경
전시실 입구

서울역사박물관 우측의 <우리들의 광복절> 대형 게시물

서설이 길었네요. 박물관 정문 우측에 <우리들의 광복절> 전시를 알리는 대형 게시물이 그리고 1층 왼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전시 포스터 게시대와 전시실이 나와 손쉽게 전시실에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 공간은 크게 다섯 가지 “프롤로그 : 광복의 그날”과 “에필로그 : 우리들의 광복절”, “1부 광복절의 기록”, “2부 광복절의 기억”, “3부 광복절의 추억”으로 구성됐습니다. 1부와 2부가 가장 전시물이 많고요, 아이들의 체험활동을 생각하면 에필로그 공간에서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시를 열며

빛을 되찾은 나로부터 어느덧 80년. 그날의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해방 이후 80년 동안 서울에서 다양하게 펼쳐진 광복절이 어떻게 기념되고 기억되어 왔는지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광복 80년을 기록한 자료와 광복절의 추억을 담고 이/T는 이야기를 함께 소개합니다. 해방의 환희에서 분단의 상처를 넘어 시민 축제의 장으로 이어지는 광복절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소중한 유물과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목소리도 함께 전시합니다. 광복의 기억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의 광복절을 다시 마주하는 전시가 되길 기대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최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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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광복절>


“프롤로그 : 광복의 그날”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았던 공간이었습니다. 1945년 바로 광복의 그 직후의 모습과 관련 물건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 게시글에도 소개드렸듯이 1945년 8월 15일 당일에는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 일본 왕의 항복 선언 내용을 우리 국민들이 못 알아들었기에 광복이 되었는지를 대부분은 몰랐지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널리 전해졌을 텐데요.


그동안 이 광복했던 그 해의 에피소드를 잘 접할 수 없었기에,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굉장히 반갑고 흥미로웠습니다. 전시물의 배경이 되는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니 감격스럽더군요.


독립기념 태극 그림(1945년 제작)

가장 먼저 본 전시물 “독립기념 태극 그림”은 1945년 광복 직후 제작된 조선독립기념 태극기로, 중앙의 태극문양과 그 아래에는 ‘조선독립기념(朝鮮獨立紀念)’, 좌우의 한자는 우측은 ‘일구사오년’ 좌측은 제작 주체로 보이는 ‘정신보급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독립기념 태극기 처음 봤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많은 글귀나 그림 없이 딱 핵심만 표시돼 여백의 미가 돋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긴, 기쁨을 만끽하기에 바쁜 마당에 미사여구나 수식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독립했다는 사실일 뿐.


해방조선 기념우표와 편지지 / 독립기념 메달

어떤 기념물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것들이 기념우표와 메달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1945년 제작의 기념우표와 메달이 있었더라고요. 독립 상징물과 태극기가 그려진 6개의 우표, ‘해방조선’ 문구와 독립을 축하하는 문양이 새겨진 편지가 담긴 “해방조선 기념우표와 편지지”에서 독립의 기쁨을 물씬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945년 제작된 “독립기념 메달“ 앞면의 가운데 원 안에는 제가 느끼기에 숭례문을 닮은 문의 형상이 위로는 조선국(朝鮮國), 아래로는 독립기념(獨立紀念)이, 뒷면에는 제작한 날짜기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신병준 일기장(1945. 6. 3.~11. 20.)

굉장히 귀한 자료가 하나가 보였는데요. 1945년 6월 3일부터 11월 20일까지 하루하루의 기록이 담긴 일기장이었습니다. 교직에 있던 신병준 기증자가 교직에 있을 무렵 광복 전후 서울의 생생한 분위기를 일기로 기록한 것인데, 일본어로 작성되어 오다 광복 사실을 알게 된 8월 17일부터 한글로 기록하였답니다.

음력 7월 8일(8월 15일 목요일) 어제보다 훨씬 더운 하루였다. 서도(書道)를 했으나 힘이 없어서 잠시 쉬었다. 소련군은 웅기(함경북도)까지 진격했다. 북만(북만주)에서도 대규모 작전을 하고 있다. 육군 대국의 포고와 정보사령관의 담화가 있었다. 최악의 사태다.

음력 7월 9일(8월 16일 목요일) 일본은 휴전했다고 알렸다. 어제 라디오에서 방송했다고 한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소련 참전과 신형 폭탄에 대한 공포는 어마어마하다. 벌써 인민은 여기저기 흥분의 도가니로 의기충천하다.

음력 7월 10일(8월 17일 금요일) “동진공화국* 만만세!” 세기에 빛날 우리 조선은 독립이 되었다. 아, 그리운 조선 독립. 반도 삼천리강산은 이제야말로 만세 소리에 가득하다.

*해방 당시 유언비어처럼 퍼진 가상의 독립 국가명

- 신병준 일기장 내용 中 -

전시관에 게시된, 1945년 해방 후 기뻐하는 국민들 모습

광복 당일에는 역시나 광복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러시아군이 진격하는 등 일촉즉발의 심각한 상황으로 그날을 그리고 있었네요. 그러다 하루가 지나서야 일본의 항복 사실을 인지했고, 또 하루가 지나 17일에는 만세 소리가 가득했고 충주로 간 18일에는 반도의 민족이 환희와 희망으로 마음껏 축복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광복 당일부터 나흘의 기록을 읽는 동안 기쁨이 전해지긴 했지만 당시 우리 국민들의 기쁨의 정도가 얼마나 됐을지는 감히 가늠이 안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일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료가 되었네요. 기록해 주시고 기증해 주신 신병준 선생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왼쪽부터) 국제보도 창간호 / 경성일보 1945. 8. 16. 호 / 김구 선생 이름으로 배포된 임시정부 인쇄물

이외에도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의 이름으로 배포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인쇄물과 해방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낸 사진과 기사가 수록된 잡지 ”국제보도 창간호“,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 조사가 실린 ”경성일보 - 1945년 8월 16일 호“ 등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어


1부. 광복절의 기록

광복절 경축식은 단순한 기념식을 넘어 시대정신과 국가 정체성의 변화를 반영하는 상징적 행사입니다. 좌우 이념 대립과 미군정의 긴장이 고조되던 1946년, 정부 수립 이전에 열린 첫 번째 광복절 경축식은 민족 통일과 자주독립이라는 이상을 표방하였습니다. 이후 광복절은 의례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대표적인 국경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최근의 광복절 경축식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의 고통과 희생, 식민지의 상흔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역사 본연의 의미를 되찾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시민 참여가 확대되고, 다양한 사회 계층과 세대의 대표들이 함께하는 열린 형식의 행사로 점차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광복절은 단지 과거를 기리는 날이 아니라 해방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살아 있는 역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시대사에 따른 광복절 행사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로 교육적 및 지식적 측면에서 유익한 정보∙내용이 주를 이뤘습니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광복 관련 전시들을 보면 다소 겹치거나 유사한 성격의 전시도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광복절 기념식 및 행사의 역사를 다룬 것은 이곳 특별전만의 시그니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이 이번이 80주년이기에 광복절 역사를 다룬 점은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기념일에서 광복절까지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맞이한 이날은 아직 ‘광복절’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청은 8월 154일을 ‘해방일’로 지정하고 공휴일로 지정하였는데, 1947년에는 이를 ‘해방기념일’로 바꿔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여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이 개최되었고, 1949년에는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졌습니다. ‘광복절’이라는 공식 명칭은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사용되었는데 이후에도 ‘8∙15’, ‘해방기념일’, ‘독립기념일’ 등 다양한 용어가 혼용되었습니다.

처음에 해방일, 해방기념일이라고 했던 점은 흥미로웠습니다. 왜 “광복절”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해 딱 한 두 번 정도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내 그 생각을 접고 더는 나아가지 않았었는데요. 알고 보니 법률로 정해서였네요. 그것도 독립기념일과의 명칭 논쟁 끝에 광복절이라고 명명된. 단순히 독립으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 주권을 온전히 회복했다는 자긍심을 담은 “광복”으로 지은 것, 그 마음 잘 새기겠습니다.

광복절 명명의 유래

역사적인 첫 번째 기념일은 조동식의 개회 선언, 오세창의 개회사,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축사, 이승만∙김구의 기념사 그리고 여자중등학교 합창단의 ‘해방기념가’ 합창, 유억겸은 연합국에 보내는 메시지를, 서정희는 결의문을 낭독했고, 김구의 선창으로 만세삼창과 함께 남북통일과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전시물 내용 중

첫 기념일만의 특성이 엿보였는데요. 하지 사령관이 축사 전 옥새 반환을 발표한 것과 연합국에 메시지를 보내고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진 부분, 부대행사로 진행된 퍼레이드 등이 그러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던 백범 김구 기념사의 앞 문장은 정말 명문이며 그 말대로 역사가 흘러간 것 같아 소름도 돋았습니다

“부탁하노니 동포여 미군정에 아첨에 신경을 모리를 일삼는다든지 사리와 사욕에 눈이 현혹한다든가 하여 자립과 민족의 복리에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공약된 독립은 안전에서 만 리 외 창해 밖으로 다름 질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에 우리는 분단이 됐고 6∙25 전쟁까지 벌어졌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죠. 우리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물론 현재까지도 위의 행위로 우리 사회는 하나가 되지 못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첫 광복절에서 나온 당부를 80주년을 맞이한 지금부터는 절대 잊지 않고 잘 실천해야겠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넘어 국가 의례로

6∙25 전쟁 이후 광복절의 의미는 새롭게 정의되었습니다. 광복절은 해방의 기쁨을 강조하기보다는 ‘정통성 수립’과 ‘반공주의’ 강화를 위한 행사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광복절 경축사에는 단독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반공 이념을 강화하며, 국가 생존과 재건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광복절 경축식과 함께 대통령 취임 기념식이 치러지기도 하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광복절 경축연이 열리기도 하는 등 경축 행사는 점차 의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광복절은 해방의 기쁨을 기리는 날을 넘어, 이념과 권위를 강조하는 국가 의례로 변모하였습니다.


국경일로 지정된 후의 첫 광복절은 공교롭게도 6∙25 전쟁 중으로, 임시수도였던 대구 문화극장에서 51년에는 부산 경남도청 내 국회의사당, 52년에는 서울 중앙청에서 열렸답니다.

6. 25. 전쟁 중에도 열린 광복절 경축식


전쟁 이후에는 해방기념일을 넘어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권위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국가 의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은 참 많은 것을 바꿨네요. 광복절의 의미도 기존의 해방의 기쁨과는 다른 성격으로 흘러갔고 말이죠. 국가 의례로 이어진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 방향성과 취지 및 내용이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이제는 어떤 시국 속에서도 광복절 기념행사의 목적이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미와 함께 해방의 기쁨을 더 강조하는 날로 이어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국가 경축식에서 역사의 무대로

광복절은 점차 정치적 통치 수단이자 국가 정당성을 선전하는 무대로 기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 경축식은 규모와 형식 면에서 대폭 확대되었으며, 정부의 주요 국정 방향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공식 통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무렵 산업화의 성과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각종 기반 시설 준공식이 광복절에 맞춰 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면서 행사가 일시적으로 축소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광복절은 대북 메시지와 대일 관계 등을 포함해 미래지향적 민족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0~70년대의 광복절은 정치적 통치 수단으로, 국가 정당성을 선전하는 목적으로 계속 기능했습니다. 1966년 광복절 날 서울시는 도시계획전시장을 설치해 「서울 도시기본계획」을 소개했고,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이에 앞서 19070년 남산 1호 터널, 1971년 퇴계로 지하차도 개통 등 각종 주요 시설물의 준공식 및 개통식이 광복절에 열렸더군요. 물론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겠지만, 광복절에 국가의 미래 비전과 국민에 희망찬 국가사업을 보여주는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의도는 없었으면 하고요.


역대 주요 경축식 장소

아무쪼록 국가기념일로 형식 면에서는 큰 규모의 행사로, 동대문운동장∙효창운동장∙시민회관∙중앙청∙장충체육관∙국립극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열려왔는데요. 제40주년 장소인 세종문화회관에서 근래에는 주로 열려왔는데, 올해 제80주년 경축식도 같은 곳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40년 전에도 그리고 40년 후에도 같은 장소에서 광복절 경축식이 열려 온 국민이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점에서 말이죠.


1974년 그 역사적 사건이 광복절에 일어난 일이었군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9주년 경축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되었고 이후에는 행사가 축소되었다 합니다.


광복절 특별사면 및 타종행사, 독립기념관 설립 관련 내용

늘 광복절이면 화두로 떠오르며 영화 소재로도 쓰인 바 있는 “광복절 특별사면”이 1946년 해방기념일의 모범수 가석방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 광복절 보신각 타종식이 1959년에 최초로 열린 것, 1987년 천안에 개관한 독립기념관이 국민 성금 모금운동을 통해 세워졌다는 내용까지. 여러모로 이날 처음으로 알고 배워간 내용이 많았답니다.

그나마 좀 알고 있던 내용인 이산가족 상봉도 처음 논의는 1971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나온 이야기였고요(비록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1985년 9월에 처음 성사되긴 했지만).


국경일을 넘어 축제의 장으로

1990년대 광복절은 국가 중심의 기념일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기억을 생산하는 시민 축제의 장으로 전환되어 갔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이러한 변화는 본격화되었습니다. 1991년 9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은 분단 이념에 균열을 가져왔고, 1993년 10월 ‘역사 바로 세우기’ 선언은 광복절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통령 경축사에는 국민 통합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강조되었고, 경축식의 부대행사도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광장 중심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후 광복절은 시민이 함께 참여하고 만들어 가는 축제의 장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제8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가 이렇게나 많이 열리고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게 된 그 계기는 1995년 광복 50주년 경축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민이 참여하고 문화예술∙역사성∙미래지향성을 결합한 축제형 행사로 변모되었습니다.


광복절 행사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당일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을 담은 “1부. 광복절의 기록” 파트는 정보와 내용이 많아 어떤 분들에게는 빠르게 지나갈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잘 몰랐던 역사적 이야기를 듬뿍 얻어 갈 수 있어 제게는 굉장히 유익하고 좋았습니다.

2부. 광복절의 기억

광복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국가가 주도하던 기억에서 시민이 주체가 되는 기억으로 변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복절 부대행사와 대중문화는 시민의 감정과 일상이 반영된 살아 있는 역사 재현의 장으로 자리해 왔습니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광복의 의미를 더욱 다층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문학∙영상∙음악∙미술 등 장르를 넘나들며, 광복절은 더 이상 국가의 언어가 아닌 시민의 목소리와 예술가의 시선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제 광복절은 특정 공간에 한정된 국가 의례가 아니라, 시민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살아 있는 국경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비중적으로나 소재적으로나, 이번 특별전의 야심작은 남녀노소 모두가 재미있게 관람하는 등 인기가 높은 2부 전시 공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선 전시 공간에서 광복절 기념식 중심의 역사를 다뤘다면 여기서는 광복절과 대중문화를 다뤘기 때문에 아무래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문화에 비친 감격과 혼돈의 시대

광복을 맞이한 서울에서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유의 환희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당대 작가들은 시와 소설, 음악으로 해방의 감격뿐만 아니라 민족의 현실과 다가오는 분단의 불안을 함께 그려냈습니다. 일제강점기 검열로 위축되었던 우리 노래도 다시 불리며 해방의 기쁨을 시민들과 나누었습니다. 신문과 잡지도 잇달아 속간되거나 창간되어 해방기 사회와 문화를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신탁통치 찬반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감격의 시대는 곧 혼돈의 시기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 모습

2부의 첫 번째 게시물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광복 직후의 상황을 다뤘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했어요. 이내에 신탁통치 찬반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며 이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은, 광복을 맞이하여 많은 국민들이 기쁨을 마음껏 누렸고 당대 예술가들은 이를 각 분야의 작품으로 표현했답니다.


아이들이 광복 당시 노래를 듣고 있다.

1945년의 기쁨과 환희의 노래 “사대문을 열어라(원제:인민의 노래)”와 “해방의 노래”는 직접 들어볼 수 있게 구성되었고,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진짜로 줄을 서서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린이들에게 늘 양보하는 저는 다른 전시물을 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잠깐 들어봤는데, 옛 노래의 음성에서 한 구절 한 구절에서 기쁨이 전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발간된 각종 작품들


해방 직후 당대의 작품들

그 옆에는 당대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는데 ‘김구선생혈투사’, ‘여운형투쟁사’와 같은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조선소설집 등 소설 모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시집, 영화 전문 잡지와 ‘조선건축’이라는 건축 전문 계간지까지 당대의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 예술작품을 통해 광복 직후의 시대 모습을 알 수 있기에, 기록물로도 유의미한 작품입니다.


대중문화에 담긴 두 얼굴의 시대

6∙25 전쟁 이후 광복절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50년대 문학∙음악∙영화 등은 광복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이라는 이중의 역사 인식을 담아냈습니다. 문학은 해방과 분단 사이의 역사적 긴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으며 대중음악은 전쟁과 실향의 감정을 대변하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남북 대립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어 이념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또한 재일교포 학생 야구단을 초청해 모국 방문 친선 경기를 여는 등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고통의 시대는 길었는데 기쁨의 시대는 짧았다는 것이 원통스럽네요. 6∙25 전쟁 이후 광복절은 광복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이 혼재했습니다.


여기의 첫 게시물도 ‘실향과 이산의 선율’ 제목 아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TV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번 들어본 적 있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굳세어라 금순아’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역시나 아이들이 꾸준히 자리 잡고 있기도 했습니다. 작품 전시에서는 해방 그리고 전쟁과 분단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들이 이 시기 많이 나왔음을 확인했습니다.


대중문화와 함께한 또 하나의 해방

광복절은 영화∙텔레비전∙라디오 등 시청각 매체를 통해 재구성되며 선전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중매체를 동원해 광복의 감동을 연출하고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한편, 일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해방과 전쟁, 분단을 겪은 세대의 자기반성을 문학과 예술로 표현하며 대응하였습니다. 이로써 광복절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나로서 ‘자유’와 ‘민족 해방’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민들은 이날을 통해 또 하나의 해방을 갈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요 “향수”를 듣고 있는 어린이

이번에도 노래 감상 전시로 시작, 나훈아의 “고향역”과 정지용의 시에 이동원∙박인수 님이 부른 제가 좋아하는 "향수“의 노래로 모두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곡들이지요. ‘고향을 그리는 소리’ 속 두 노래의 가사는 사실 지은이가 남북 분단으로 인해 고향에 못 가는 내용은 아니긴 하지만(정지용은 일본 유학 중 고향을 그리워한 것이고요), 많은 실향민들에게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곡이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는, 여기서는 1부에서도 다뤄진 것처럼 국가가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텔레비전∙라디오 등 매체를 활용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후 광복일의 민주화 운동 등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은 옛날 영사기, TV와 오디오 등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제대로 끌었어요.

관객들이 옛 TV를 흥미롭게 보고 있는 모습

특히 여기서는 어른 관객들께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시고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960~1980년대까지라는 광범위한 시대를 다뤘기에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건 시대상에 따라 광복과 관련한 대중문화가 변모해 왔고 또한 발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대중문화 속에 담긴 시민의 이야기

1990년대는 대중문화가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 시민의 삶과 기억에 더 가까이 다가선 시기였습니다. 특히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을 전후로 공영방송과 문학, 시각예술 등 다양한 매체는 국가 주도의 일방적 서사를 넘어 해방과 분단, 민족과 개인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모색하였습니다. 이념을 넘어 개인의 생애를 조명하고 민중의 시선으로 격동의 역사를 서술하는 등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기억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해방과 분단, 통일의 역사는 이제 국가 기념일 속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와 예술로 풀어내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확장되었습니다.

대중문화 역시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점으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광복 서포터스 영광 발대식 강의에서도 납북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무려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헌장 초안 등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행한 조소앙 선생이 납북되었기에 업적에 대한 평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무용가 최승희 관련 전시물

여기 전시 공간에서의 메인 조명 인물은 바로 역시 월북 인사로 금기시되었던 무용가 최승희입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KBS에서 특집극 <최승희>를 방영하며 그 삶을 재조명했다네요. 제가 이 인물에 대해서는 찾아본 적이 있는데, 한국 무용을 세계에 알렸던 대한민국의 현대무용 시작으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월북한 뒤에는 결국엔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요. 다만, 월북 외 그 이전 친일행적이 있다는 논란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전시에서는 안 나와 있었습니다.


광복50주년의 위안부 피해자 관련 전시 내용 / 박경리와 소설 '토지' 관련 전시

광복 50주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을 담은 전시도 열렸는데 이 이야기가 좀 더 높은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은 부분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한국 대표 소설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관한 전시가 있었는데요. 이 소설이 광복절과 깊은 관련을 지닌 작품이어서 역시나 50주년 기념으로 1995년 KBS 대하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합니다. 작품은 광복을 단순한 해방의 순간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저항이 층층이 쌓인 역사적 여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전시물 문구에 나와있었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이 공간 들어서기 전 좌측 정면에는 대형 프로젝트로 “조선총독부” 철거 관련 영상과 바닥에 그 철거 부재가 전시돼 있었습니다. 역시나 광복 50주년을 맞아 행해진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 하나였는데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 역사 바로 세우기 게시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광화문 제자리 복원”, “임시정부 요인 유해 봉환과 사 직지 복원”, “초등학교→초등학교 명칭 변경”,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 “독립유공자 포상의 확대”

광복 50주년 때 다방면으로 정말 많은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났네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지금도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늦은 감이 있더라도,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많은 것들이 바로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3부. 광복절의 추억

광복절은 누구에게는 해방의 기쁨으로, 누구에게는 애국의 상징으로, 또 누구에게는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날로 기억됩니다. 지난 80년의 세월 동안 마음속에 남은 수많은 추억이 서로 얽히고 이어져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광복절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환호성과 태극기의 물결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흩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던 애틋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 공간은 시민들이 소중히 간직해 온 추억을 통해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모인 개인의 기억은 하나의 역사로 이어지며,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이 시간 또한 언젠가 추억이 되어 우리들의 광복절을 완성할 것입니다.

광복 80주년 서울의 변천사

서울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인포그래픽

3부 공간은 서울에서의 행정, 물가, 교통, 가구, 인구 등에서의 변천사 관련 이야기를 인포그래픽으로 재미있게 표현한 파트와 광복 80주년을 맞아 시민들께서 광복 관련 물품을 기증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서울의 변천사에서는 질문을 열면 답이 나오는 구성으로 연출된 부분이 재미있었는데요. 가장 먼저 제 손을 움직인 질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얼마였을까”로, 지금 750원 정도인 동 제품의 라면이 60년도 더 전인 1963년에는 10원이었더라고요.

라면 가격과 서울시 행정구역의 변화 인포그래픽

서울이 고향이 아닌 저는 “서울은 얼마나 커졌을까?”라는 질문의 답도 궁금했는데 1945년도 서울은 행정구역 상 불과 8개 구, 269개 동에 불과했었습니다. 지금은 25개 구, 행정동 426개 동인데 말이죠. 저처럼 지방에서 자라온 분들은 서울이 수십 년 전에도 컸을 거라고 알고 있는 분들 있을 겁니다. 실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게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답니다. 인포그래픽 형태로 보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보여준 서울의 변천사였습니다.


광복 80주년 기념 시민 기증 캠페인

시민이 기증품 전시물

시민 기증품 전시 공간에서 놀랐던 점은 거창한 물건이 아닌, 광복 50∙60∙70주년의 행사 리플릿과 기념품 혹은 굿즈들이 제법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광복 80주년을 맞아 제가 받은 많은 물품들이 10년이나 30년 뒤에는 광복 관련 역사적 물품으로 기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행사장에서 받은 광복 80주년 에코백, 볼펜, 부채, 티셔츠 등 물품과 여러 전시 리플릿을 잘 보관하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물품 기증해 주시고 인터뷰 영상을 통해 전시의 한 공간을 채워주신 기증자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역대 광복절 경축식 행사 자료 및 기념품


“에필로그 : 우리들의 광복절”

체험 및 참여 프로그램 안내 게시물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시작이잖아?”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온 부모라면 말이죠. 이제 전시나 행사에 있어서 이 프로그램은 필수입니다. 바로 체험 프로그램입니다. 태극기를 엽서에 색을 칠하고, 또 빨∙파∙검∙흰의 태극기에 들어가는 색상의 소원지에 소원을 적은 다음 이를 정면의 대형 게시대에 걸어 모두가 함께 태극기를 완성해 나가는 공간입니다.


가운데 태극 문양은 잘 보였는데, 네 모퉁이의 4괘는 많은 참여자들의 엽서로 조금 가려진 모습이네요. 이제 전시의 시작 시기니만큼 후에 오시는 분들은 검은색 소원지를 활용해 4괘를 그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엽서 그리기 책상 우측에는 “영수증 사진기” 박스가 있었고 사진 찍기 버튼을 누르면 바로 흑백으로 셀카 사진이 아래의 컬러 사진 다운로드 큐알코드와 함께 나옵니다. 이 큐알 코드를 접속하면 컬러 사진으로 다운로드가 가능하고요. 다른 건 어린이들에게 양보해도 사진 찍는 건 간단했기에 저도 한 번 해봤습니다. 종이 인쇄에 이어 컬러 파일 다운로드까지. 참 기술과 아이디어가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진 찍기였습니다.

영수증 사진기로 찍은 종이 사진과 컬러 다운로드 사진

“이제 그만하고 가자”라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볼멘소리가 들렸는데요. 어린아이들에게는 앞선 전시물 보는 시간보다 이 체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점, 그렇지만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는 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태극기 그리기에 열중하는 아이 그리고 부모


“광복 80년 기념 전시, 모바일 스탬프 투어”

모바일 스탬프 투어 안내문

[스탬프 투어 기간 : 8. 9.~8. 24.]

8. 9.~8. 17. 광복 80년 기념 한정 기념 화폐

8. 18.~8. 24. 김구 선생∙유관순 열사 키링

[스탬프 지급 장소]

빛을 담은 항일유산(덕수궁 돈덕전), 8. 12.~10. 12.

되찾은 빛

이어질 노래 아리랑(국립민속박물관 파주), 7. 15.~8. 31.

태극기, 바람 속의 약속(독립기념관), 8. 15.~11. 23.

임시의정원에서 국회로(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8. 15.~’26. 1. 11.

우리들의 광복절(서울역사박물관), 8. 5.~11. 9.

과학조선을 꿈꾸다 : 과학기술자들의 독립운동(국립과천과학관), 8. 14.~10.12.


8월 9일부터 24일까지 광복 80년 기념 전시 6곳을 방문하여 3개 이상의 스탬프를 획득하면 선착순 7천 명에게 광복 80년 한정 굿즈 “기념 화폐”와 “독립운동가 키링”을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우리들의 광복절> 특별전도 6곳의 전시 중 하나며, 태극기 그리기 테이블에 스탬프 큐알코드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놓치지 않았답니다.

모바일로 스탬프 찍기 하나를 완성, 한 주 내 80주년 기념 전시 보고 두 개의 스탬프도 더 찍어 최종 완성과 더불어 기념품 굿즈도 받아보려 합니다. 스탬프 투어가 아니라도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들 하나같이 유익하고 재미있으니 겸사겸사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광복절 내 스탬프투어 큐알코드와 스탬프를 찍은 화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적인 1945년 광복 직후의 모습 그리고 80년에 이르는 광복절 경축식의 역사와 변천사 등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학창 시절 제대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교과서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내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한 국민이라면 우리 광복과 광복절의 역사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더욱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광복 정신을 잘 알고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시실 내부 모습

다행히 <우리들의 광복절> 특별전은 11월 9일까지 계속됩니다. 한 번쯤 들를 시간 있으실 테니 꼭 관람해 보시길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기왕이면 선착순으로 굿즈가 지급되는 스탬프 투어 기간 및 빠른 시일 내에 해당 전시관 세 곳 이상을 방문하셔서 광복 80주년 한정 굿즈도 받으시고, 훗날 뜻이 되신다면 10년 후나 20~30년 후 기증품으로 기증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가족들 혹은 친구 및 지인들과 함께해도 좋고 혼자서도 좋습니다. 오셔서 광복 80년 사도 되돌아보고 많은 것 알고 배우고, 광복의 감격과 기쁨까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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