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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 특별전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광복 전에도 후에도 우리와 함께 한,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태극기

by 곽한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태극기는, 80년 전 광복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으며 특히 3.1 만세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 활동 시 상징적인 역할 및 의미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널리 알리는 “YOUNG:光” 서포터즈로서 발대식 이후 가장 먼저 특별전 <우리들의 태극기>를 소개해 드린 바 있는데요. 이번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 80주년 특별전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태극기 전시를 한 번 다녀온 입장에서 또 다른 태극기 관련 전시를 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선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태극기들도 많았고 태극기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함께 있었습니다. 즉 태극기 관련 특별전을 보셨더라도 차별화가 되어있기에 이 전시를 보셔도 무관하며, 오히려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더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서설이 길었는데요. 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지 이해가 되도록 아래에서 관람 후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 포스터

기간 : 2025.08.08.(금) ~ 2025.11.16.(일) 10:00 - 18:00 (수, 토 :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장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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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전시 관련 플래카드(좌)와 3층 전시관 입구 조형물(우)
태극기가 국기로 지정된 이래 1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태극기에는 그동안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역사와 그 시간을 살아낸 이들의 감정이 서서히 스며들었습니다. 그렇게 태극기는 우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함께 걸어온 여정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태극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나라를 잃고 독립을 외치던 거리에서, 전장의 참호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광장에서, 평범한 일상과 도전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태극기와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태극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염원과 기억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태극기와 함께했던 환희와 슬픔, 고통과 극복, 도전과 재도약의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태극기는 단순한 국가 상징을 넘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정서적 매개체로서 그 안에는 공동의 기억과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태극기와 함께 했던 연대와 믿음은 지금 우리가 다시 만들어 갈 미래의 자산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전시가 태극기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광복 80년을 넘어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시간을 함께해 온 태극기", 전시를 열며 -
해방기념시집 실물과 시집에 수록된 감달진의 "아침"


전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1. 붉고 푸른 깃발 높이 들고>, <2. 그대들 돌아오시니>, <3. 기쁨과 슬픔, 희망을 담아>의 총 3가지 구역으로 모두 16개의 태극기와 그 시대의 다양한 모습 등을 담은 전시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본격 전시 전에는 "전시를 열며"를 통해 이번 특별전에 대한 취지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바람을 담은 소개와 함께, 80주년 특별전답게 광복을 맞이한 1945년 그해 12월 12일에 발간한 『해방기념시집』 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광복 직후 정인보, 홍명희, 안재홍 등 당대의 대표 문인 24명이 해방의 감격과 기쁨, 미래의 희망을 담았다고 하네요.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가 나부낀다.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 오늘 이 땅 산천은 크게 웃었다"


시집에 수록된 김달진의 <아침>에서 지축을 울릴 정도로 기쁨의 함성을 질렀고 이 땅 산천이 크게 웃었다고 표현한 부분이 예술이었습니다. 광복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이 문장으로 조금은 가늠이 됐습니다. 또한, 집집마다 태극기가 나부낀다는 내용을 통해 기쁨에는 태극기가 함께 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태극기는 이처럼 기쁨과 함께 했으며, 또 이후에 소개해 드릴 것처럼 슬픔에도 함께한 대한 국민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물이네요. 해방기념시집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1. 붉고 푸른 깃발 높이 들고

미디어 전시로 시작된 첫 번째 공간에서는 바로 태극기들이 즐비하게 등장한 것이 아닌, 태극기 관련 서사 등에 관한 내용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태극기 전시 전의 빌드업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대한의 상징으로

1883년 조선은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선포하였습니다.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조선은 19세기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당시, 태극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태극기는 국가 행사, 집회,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한국인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태극기는 1949년 ‘국기 제작법 고시’로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기까지 그 모양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시대마다 태극의 모양과 방향, 건곤감리의 위치가 매우 다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태극기의 모양은 계속 변해왔지만 한국인에게 태극기는 언제나 “귀하고 귀한 우리의 태극기”였습니다.
(좌) 태극기가 그려진 신축진찬도 병풍 | 1901 | 국립고궁박물관 / (우) 평풍 속 태극기의 모습(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누리집)


대형 병풍 전시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요. 조선 제24대 헌종의 후궁 효정성황후(1831~1903)의 71세를 기념한 궁중 행사 모습을 담은 ‘진찬도’인데요. 처음에는 '태극기랑 무슨 상관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우측 병풍을 자세히 보니 태극기 깃발이 보이더라고요. 태극기가 국가 행사에서 이렇게 쓰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태극기는 독립신문 상단 가운데에 그려져 있었고, 독립문 기공식에서는 양쪽에 게양된 되기도 했습니다.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표지 속의 태극 문양과 이를 둘러싼 무궁화 도안은 예뻤습니다. 이를 활용해 각종 굿즈에 새긴다면 인기 상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책 속의 해양 국가들의 깃발이 그려져 있었는데 역시나 태극기도 한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좌) 우측 하단에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1902)가 보인다 / (우) 독립신문과 독립문 기공식에서의 태극기 모습
태극 문양 및 태극기기 그려진 외국 도서들 / 태극기 국기해설도 등 관련 전시물들


이 공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전시물은 외국 도서 속의 태극 문양과 태극기였습니다. 다른 전시물들은 우리가 그리고 새긴 것인데 반해 여기서는 외국에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여기까지 본 태극기는 보시는 것처럼 태극 문양도 사괘의 위치 등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현재의 통일된 태극기는,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확정되었습니다. 당시의 국기해설도 등 게시물을 통해 관련 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30년 전 초청장

1896년 1월 7일, 조선은 프랑스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참여를 공식 초청받았습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각국이 자국의 산업과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국제무대였습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에 국제사회 속 한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했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역량과 정체성을 ‘대한(Corée)’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파리만국박람회 참가는 열강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한 외교적 노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주 국가로서의 의지를 세계에 알린 뜻깊은 발걸음이었습니다.
좌측의 그림은 만국박람회 대한민국관 모습의 그림 / 만국박람회 관련 전시물

이번 특별전을 통해 저에게 새롭게 조명된 행사 중 하나는 바로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였습니다. 대한제국은 1896년 개최국 프랑스로부터 당당히 공식 초청을 받았더라고요. 120년 전 행사인데 개최연도 4년 전에 초청을 받은 것으로 비추어 당대의 큰 세계적 행사가였음이 짐작되었습니다.


파리 만국박람회 초청부터 각국의 준비위원회의 행사 준비와 참가까지의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돼 있었고요.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의 공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훈 2등 태극장 세트와 샤를 알레베크가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박람회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한 엽서 등 귀한 자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엽서 속 백 년도 더 전의 광화문과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관련 전시물


마지막으로 박람회 속 대한제국관의 이야기 전시까지 흥미진진했습니다. 현지 기사에 따르면 "한국의 건축물은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언제나 자연의 경관과 어우러진다"라고 소개했고요. 건축물 모습도 실려있었습니다.


(1) 만국박람회 태극기

만국박람회 태극기(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그리고 마침내 특별전의 공식적 첫 번째 태극기,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태극기가 등장했습니다. 마치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의 우산 속 강동원 배우의 등장 신과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 배우가 연기한 수양대군 등장 신을 본 것과 같은 임팩트가 느껴졌습니다. 이 태극기를 소개하기 위해 파리만국박람회의 서사를 보았던 것이니까요. 큰 국제무대 행사에서 사용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태극기라 생각됩니다.


현 태극기와는 4괘의 모습과 위치는 같았고, 뒤에서 소개드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로 알려져 있는 '데니 태극기'와는 파랑 및 빨강의 문양 위치만 뒤바뀌어있을 뿐 이와 흡사해 보였습니다. 태극기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는 덜 알려진 태극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 특별전을 통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여했으며 우리 국가와 태극기가 세계적으로 선보이고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태극기의 등장과 함께 첫 번째 전시 공간은 끝났습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태극기가 쏟아지는 두 번째 전시 공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 그대들 돌아오시니


독립의 희망을 품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기고, 태극기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제자리를 잃어버린 태극기는 다시 돌아올 광복의 그날을 기다리며 사찰 전각 어딘가에, 독립을 염원하는 누군가의 집에 꼭꼭 숨겨졌습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우리는 품속에 숨겨두었던 불씨와 함께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목판에 태극기를 새기고, 독립을 향한 목소리를 종이에 담아냈습니다. 어둡고 고단한 시간을 지나 광복의 그날을 맞이하기까지 태극기는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공간의 첫 번째 테마에 등장하는 태극기들은 일제강점기 속 소장하게 지켜온 태극기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랬고 우리는 3.1. 만세 운동 때와 같이 태극기를 휘날리는 등에서 활용했던 것을 많이 떠올릴 텐데요. 여기서는 사용뿐만 아니라 소중히 보관하고 지켜온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하나하나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답니다.


(2) 광제호 태극기 / (3) 동의여자의숙 태극기

광제호 태극기


두 번째 전시 공간의 첫 번째 태극기는, 역시나 제가 처음 접하는 "광제호 태극기"입니다. 대한제국의 근대식 군함 광제호에 게양되었던 광제호는 서해안 경비와 세관 감시 등에 사용되었다 하는데요.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해군 군함으로 역할을 하기 어려웠지만 1910년까지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이 태극기는 경술국치(1910. 8. 29.) 하루 전날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 양무호의 함장이자 광제호에 승선했던 신순성 함장이 광제호의 태극기를 내려 남몰래 보관해 대를 이어 지켰다네요.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당부로 태극기를 1년에 한 번씩 햇볕에 말리시며 소중하게 보존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35년 가까이 일제의 눈을 피해 마음을 졸이며 태극기를 펼치셨던 할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 신순성 함장의 손자 신용석 -


처음에 외관만 봐서는 현 태극기와 비슷한, 군함에 사용되었다는 부분 외에는 그렇게 특별한 태극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전시 게시물에 기재된 위 이야기를 읽고 나니, 태극기를 지키고 보관한 신순성 함장과 후손들의 마음이 전해져 가슴 뭉클했습니다. 단순히 태극기를 내리고 분실 우려 없이 보관한 게 아니라, 일제의 눈을 피해 햇볕에 말리며 소중하게 보관한 정말 값진 태극기네요. 신순성 함장과 그 가족들도 여느 애국지사와 다를 바 없는 애국자이십니다. 함장님과 가족들의 마음 꼭 기억하겠습니다.


동의여자의숙 태극기


이어서 또 소중히 보관한 태극기가 보였습니다. 1908년 동덕여자의숙 개교 당시부터 교정에 게양되었던 이 태극기는, 3.1 운동 직후 일제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상자에 담아 장롱과 장독대 밑에 숨겨서 지켜온 태극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험 부담 속에서 소중히 지켜온 태극기는 광복 후 다시 학교에 걸렸다고 하고요.


(4) 진관사 태극기 / (5) 백양사 태극기

진관사 및 백양사 태극기 전시 공간


불교계와 사찰에서도, 비록 조금 찢기긴 했지만 소중히 태극기를 지켰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여러 특별전과 행사에서 빠지지 않았던 진관사 태극기는 이제 저에게 친숙합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해 드리자면,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의 해체 및 복원 과정에서 벽체에서 발견된 태극기입니다. 태극기는 독립 관련 신문들 사이에 쌓여서 소중히 보관되었는데 이 신문들 또한 역시 아주 중요한 항일 유물이고요. 누가 숨겼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3.1 운동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보낸 독립운동가이자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에 머물렀기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관사 태극기
백양사 태극기

그리고 제가 몰랐던 사찰 보관 태극기가 하나 더 있었더라고요. 바로 백양사 태극기로, 1996년 백양사의 대형 불화(괘불) 보관함 깊숙한 곳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괘불의 제작 시기로 보아 일제강점기 제작으로 추정되고, 발견된 백양사는 일제강점기 항일민족교육을 이어나갔던 만암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있었던 사찰입니다. 만암 스님은 민족정신을 함양했던 '광성의숙' 설립에 앞장서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설명돼 있었습니다. 백양사 태극기는 바탕의 풀잎 배경이 예쁘고 태극 문양 등의 색감은 참 곱지 않나요? 진관사 태극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백양사 태극기와 독립운동가 만암 스님이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독립선언서를 게재판 독립신문 상해판 등 전시물

사찰 보관 태극기 옆에는 상해 독립신문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1920)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캘리포니아 다뉴바 한인들의 독립선언 제2주년 행사 속 태극기 모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귀향, 우리 곁으로

고국을 떠나 해외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이 광복 이후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해외동포뿐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태극기들도 다양한 사연을 품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동고동락했던 태극기, 일본에 의해 빼앗겼던 태극기, 고종의 당부를 담은 태극기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태극기가 우리 곁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를 되살리려 애쓴 수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앞선 파트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온 이 아기였다면, 이번 파트에서는 물론 소중하게 보관한 것에 더해 고국을 떠나 돌아온 태극기에 대한 전시입니다.


(6)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대한민국 의정원 태극기와 관련 영상, 독립운동가 김봉준의 물건이 전시되어 있다.


움푹 안으로 들어간 전시 공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었던 태극기 3개가 있었습니다. 특히 가운데 태극기는 임시의정원의 의장을 지낸 김봉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만든 태극기인데요. 1987년 처음 공개된 태극기 이야기와 당시 93세이던 노영재 여사의 사연이 담긴 영상이 있었습니다.


"이 태극기를 만들어서 우리나라 독립하고 다 한다고 그래서 아 좋다. 기쁘다 하면서 했어요" - 노영재 여사 -

김봉준-노영재 부부가 손바느질로 만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저 안 울려고 했거든요. 이 영상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국 독립을 꿈꾸며 기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며 손수 천을 사서 바느질을 해서 만들었다는 이 말씀에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태극기를 자세히 보면 태극 문양과 4괘가 그린 것이 아니라 바느질로 꿰맨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롱 깊숙한 곳에 고이 보관해 오시다 1987년에 공개되었답니다.


부부가 바느질로 만든 태극기라는 점에서, 지난 7월 우리들의 태극기 특별전에서 남상락-구홍원 부부가 함께 손바느질로 만든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생각나기도 했는데요. 지극정성이 담긴 보물과 같은 태극기를 만드신 독립운동가 김봉준-노영재 부부와 그 독립에 대한 열망 잊지 않겠습니다.


(7) 대한제국 통신원 태극기

대한제국 통신원 태극기


제가 서두에서 기존에 태극기 관련 특별전 보셨더라도 아무 문제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직 절반도 등장하지 않은 시점에 또 하나의 처음 보는 태극기, 대한제국 통신원 태극기가 등장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우편과 전신 등을 담당한 관청인 통신원에 게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 태극기는 1905년 '한일통신협정' 체결로 통신 사업관 및 관련 설비가 일본에 넘어갈 때 함께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 일부 다른 문화유산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풍파를 겪은 흔적이 태극기에서 전해져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와 다행입니다.


(8) 데니 태극기 / (9) 숭실학교 태극기

어린이들이 데니 태극기를 관람하고 있다.

비교적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1891년 조선을 떠나는 외교고문 데니에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상징성이 짙은 "데니 태극기"입니다. 저도 데니 태극기 자체는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과정은 처음 알았는데요. 한 역사학자가 '데니 외교문서'를 발굴하면서 1977년에 세상에 알려졌고, 대대로 태극기를 보관한 데니의 후손과 역사학자의 만남을 통해 1981년 6월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데니 태극기
숭실학교 태극기


그 옆의 숭실학교 태극기도 7월에 갔던 특별전을 통해 알고 있던 태극기인데요. 그때는 축약된 태극기인데 반해 이번에는 실물 크기로 보니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때 평양 숭실학교 학생들은 내렸던 태극기를 다시 내걸고 함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때 숭실학교 사무엘 모펫 교장은 일제에 압수될 것을 우려해 잘 숨겨 보관하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아들 제임스 모펫에게 잘 간직해 줄 것을 당부했고, 1974년 9월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한국에 태극기를 기증하여 이렇게 우리들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나라의 태극기인데, 본인의 고국으로 가져간 이후에도 대를 이어 태극기를 소중히 보관하고 한국에 기꺼이 기증한 데니와 사무엘 모펫 가문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두 태극기 근처에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과 엽서 속 태극기도 볼 수 있으니 관람하실 때 확인 바라겠습니다. 이를 끝으로 두 번째 전시 관람이 끝났습니다. 건너 복도 한편에 비치된 전시 리플릿과 16개의 태극기의 설명이 담긴 모니터를 살펴본 다음 같은 층이지만 떨어져 있는 세 번째 구역으로 향했습니다.


제3 전시실 입구



3. 기쁨과 슬픔, 희망을 담아


흰 바탕에 마음을 담아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의 기억이 빼곡하게 새겨진 태극기에는 광복을 바라던 우리의 염원과 연대와 희생으로 지켜낸 우리의 보편적 가치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시대마다 새로운 도전 앞에 선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한계를 극복했고, 모두의 응원을 담은 태극기는 우리에게 용기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광복 80년, 흰 바탕에 담아 온 우리의 마음을 다시 되돌아보려 합니다.


(10) 대한인국민회 태극기 / (11)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대한인국민회 태극기

세 번째 구역 첫 태극기는 "대한인국민회 태극기"입니다. 2003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총회관 복원 중 다락에서 발견되었다네요. 오늘날의 태극기와 동일한 모습의 이 태극기는 위 단체 행사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와 대한인국민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심이 돼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죠.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는 몇 년 전 "도산 안창호의 날"을 제정했고요. 미국 LA의 한 교차로에는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라는 이름의 표지판도 있습니다. 그 미국에서 이처럼 우리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을 위대하게 보고 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태극기를 보며 해외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사진 찍는 것을 깜빡한 삼각 깃발 형태의 멋스러운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도 있으니 빠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12) 무운장구 태극기

무운장구 태극기

한국전쟁 당시 쓰였던 무운장구가 기재된 태극기가 한두 개가 아니었네요. 제가 보지 못했던 태극기가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전쟁에 참전하는 장병들이 조국 수호를 맹세하고 무운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태극기에 각자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독립 전쟁이 아닌 민족 간의 전쟁 때 태극기라 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 태극기를 보면서 한국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어서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 번째 구역에서는 1949년 공식적으로 통일했기 때문에서인지, 현재의 모습과 동일한 태극기들만이 보였습니다.


(13) 5.18 민주화 운동 태극기(박관현 태극기)

5.18 민주화 운동 태극기(박관현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별도 공간에 특별히 마련된 "박관현 태극기"의 주인공 박관현 열사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때 전남대 학생회장이었으며, 도피 생활 끝에 1982년 체포돼 옥살이 중 단식투쟁을 벌였고 이후 사망했습니다. 위 태극기는 박관현 열사의 관을 덮은 태극기로 1997년 공개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 때도 함께 했던 태극기입니다. 무운장구 태극기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는데요. 다시는 이러한 희생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4) 구축함 함장 태극기 / (15) 히말라야 원정대 태극기 / (16) 남극 탐험대 태극기

구축함 함장 태극기 / 마칼루 학술원정대 태극기

1980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구축함 ‘대전함’에 게양되었던 "구축함 태극기"는, 권정식 함장이 근무 종료일 동료로부터 받은 태극기로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1년여간 항해의 여정을 함께 해선지 다소 색이 바랬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감동을 주는 태극기였습니다.


"마칼루 학술원정대 태극기"는 1982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히말라야 마칼루 등정에 성공한 마칼루 학술원정대가 정상에 꽂은 태극기입니다. 원정대에는 두 달 전 돌아가신 대한민국 전설 산악인 허영호 대장이 대원으로서 참여했답니다. 훗날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정복하고, 남북극점과 북극 횡단, 에베레스트 3회 등정한 허 대장의 전설적인의 여정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마칼루 등정이기도 한데요. 지금이야 이후의 많은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이 고봉에 태극기를 꽂았지만 당시에는 선구자 격에 들어가며 이 역사적인 순간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다른 태극기 못지않은 값진 태극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종 기지 태극기와 관련 전시 공간

마지막 태극기는 남극의 대한민국 세종기지에 게양된 "세종기지 태극기"입니다. 극한의 추위를 함께한 만큼 색이 다소 바래 있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견디고 이겨낸 느낌이 물씬 들었습니다. 이처럼 분야는 다르지만 모두 조국을 빛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 분들과 함께한 태극기였기에 보는 동안 뭉클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올림픽 관련 전시 공간

전시 한쪽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대한민국 선수단의 단복과 당시 사진 및 관련 자료, 그리고 바로 옆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단복과 마스코트 호돌이와 사진들이 함께 전시돼 있는데 역시나 이들 사진 속에서도 태극기는 함께 해 있더군요.


함께 해 온 모두의 추억을 모아

1945년 8월 15일, 사람들은 가장 특별한 하루를 맞이했습니다. 그날의 태극기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 크고 작은 기념일에 태극기가 늘 우리 곁에 있었음을 잊고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태극기와 함께해 온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모두의 소소하지만 위대한 추억들을 모으면 역사가 됩니다. 그 시간 속에서 태극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 고리가 되어줍니다. 여러분이 태극기와 함께 한 추억의 그날은 언제였나요? 태극기와 함께해 온 나날들을 돌아보며 모두의 추억을 공유해 보시길 바랍니다.


대망의 마지막 전시 공간에서는, 광복 이후 80년간 곳곳에서 사용된 태극기의 모습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해방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태극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손기정 선수의 사진부터 서울 중구 중림동 골목 안 태극기가 게양된 풍경, 삼일절과 광복절에 게양한 태극기,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응원 때 사용된 태극기까지. 우리 삶에서 함께한 태극기들의 모습이 전시돼 있습니다.


딸아이와 함께 온 한 아빠는, 2002년 월드컵 응원 사진 앞에서 딸에게 "2002년 월드컵 때 국민들이 함께 나와 응원을 했고, 엄마랑 아빠도 저 때 만났어"라고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진을 보며 당시 고등학생이던 저도 대한민국이 무려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꿈같은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벅찼거든요. 우리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 전시였습니다. 마지막 전시 공간은 이처럼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늘 함께 해 온 태극기의 모습이 펼쳐졌고, 관람객들은 각자의 좋았던 옛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훈훈함 마음을 들게 해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전시실 전경


에필로그 : 조선말 큰 사전 속 태극기

1949년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 조선말 큰 사전이 발행되었다. 사전에는 태극기 설명과 그림이 함께 실려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이며, 흰 바탕 한가운데 태극이, 사방 대각선에 네 괘가 그려져 있다고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조선말 큰 사전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극로, 최현배 선생 등 우리말을 지켜낸 많은 분들의 노고로 편찬될 수 있었다.
조선말 큰 사전 전시 공간

"우리나라 국기. 흰 바탕의 한가운데 태극을 양은 붉은빛, 음은 남빛으로 그리고, 검은빛으로 건, 곤, 감, 이 네 패를 사방 대각선 상에 그렸음"


전시의 진짜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국가 보물로 지정된 "조선말 큰 사전" 속 태극기를 정의한 문구였습니다. 정말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표현에 감탄이 나왔습니다. 대미를 장식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이번 태극기 특별전은 우려와는 달리 이전 태극기 전시에서 못 봤던 태극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900년 세계의 큰 무대에 등장했던 만국박람회 태극기, 김봉준-노영재 부부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만든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는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속을 극복한 태극기는 물론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역사적 현장을 함께한 태극기까지 볼 수 있었던 것도 의미가 깊었습니다.


광복 80년 사 우리들과 함께 해온 태극기를 통해, 광복 전후의 우리 역사를 연결하여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광복 80주년 특별전으로서 구성이 참 좋으며,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특별전이었습니다. 자신 있게 추천드릴 정도로 좋은 전시이니 종료되는 11월 15일 전 꼭 관람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에서는 위 전시뿐만 아니라 광복 80주년·발명의 날 60주년 기념 특허청 순회전 <독립과 발명>이 10월 14일까지 열리고 있고요. 또한 같은 층에는 경복궁을 직관할 수 있는 쉼터도 있으니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시도 보고 경복궁을 보며 힐링하는 시간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휴게 공간에서 본 경복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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