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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산공원&도산안창호기념관》에 다녀오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교육가·사업가·연설가, 도산 안창호 선생

by 곽한솔


위대한 독립운동가·정치가·교육가·사업가·연설가,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민족의 큰 별 도산 안창호 선생


어느덧 광복 80주년 서포터즈 “YOUNG:光”으로서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는 활동 첫 달인 7월에 광복 80주년 특별 전시 <무궁화 꽃이 피어습니다>를 보러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다녀온 바가 있는데요. 이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등록문화재 등재 9인의 독립지사의 묘와 11인의 독립운동가 추모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태원 공동묘지가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였으며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유관순 열사도 그곳에 잠들어 계셔 표지비를 건립해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역도 망우리에 있었다더라고요. 그럼 지금은 어디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이내에 ‘아차’ 했습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도산공원이 뒤늦게 떠올라서입니다. 번화가인 그 주변부를 많이 지났고 야간이지만 심지어 도산공원에 들어가 본 적도 있었는데 안창호 선생 기념관이나 묘역에는 가보지 않았더라고요. 꼭 한번 들를 것이라 다짐한 지 두 달이 지나 무더위가 한 풀 꺾인 좋은 10월 초 마침내 방문했습니다.






도산안창호기념관

도산안창호기념관 건물 전경

관람시간 : 10:00~18:00(입장마감 17:30), 휴관일 - 신정, 설·연휴

관람장소 : 도산공원 내(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


도산공원은 서울 강남권의 대표 번화가 중 하나인 '압구정 로데오거리'와 연접해 있습니다. 그 정문을 통과해 좌측 길로 가면 안창호 선생의 묘역으로, 우측 길로 가면 기념관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오후에 방문했기에 문 닫기 전 여유 있는 관람을 위해 기념관을 먼저 찾았습니다. 기념관 건물로 가는 통로 왼쪽에는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고, 입구로 가는 건물 외벽에는 선생의 모습과 활동이 담긴 사진이 게시돼 있었습니다. 입구 앞에는 벤치의 안창호 선생의 좌상이 한 번 더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홀을 살짝 둘러본 뒤 곧장 전시실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안창호 선생 동상 / 전시실 1층 로비



영상실과 연보

(좌) 영상실 / (우) 도산 안창호 연보
출생과 성장(1878) ~ 1차 도미 활동(1902) ~ 2차 도미 활동(1912) ~ 임시정부 활동(1919) ~ 3차 도미 및 대독립당 활동(1925) ~ 옥고와 국내 활동(1932)


전시실에 입장하면 바로 좌측에 '영상실'이 있습니다. 약 15분 정도 분량의 영상으로 안창호 선생의 일대기를 집약한 내용입니다. 이 영상을 먼저 보고 나면 전시 관람의 이해를 높일 수가 있기에 본 전시물을 앞서 영상을 시청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영상실 우측에는 '도산 안창호 연보*'가 있습니다. 영상과 마찬가지로 안창호 선생의 일대기와 전시 내용의 집약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라 개괄적인 흐름을 확인하고 나니 전시 관람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영상과 연보 모두 가볍게 지나가지 마시고 잘 보셨으면 합니다.

포토월과 전시실 전경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담은 문구 아래 김구, 안창호, 이탁 선생의 사진(1919. 11. 9.) 배경의 포토월이 자리했고요. 그 왼편으로 연대기 순으로 전시물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출생과 성장
1878. 11. 9.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안흥국의 3남으로 출생 ~ 1884 평안남도 대동강면 국수당으로 이거 ~ 1889 부친 안흥국 별세 ~ 1890 ~ 평양 남부신면 노남리로 이거, 서당에서 교육 ~ 1892 김현진의 문하에서 한학 수학, 필대은과 교류 ~ 1894 밀러학당 보통부 입학, 기독교 장로교 입교 1898 독립협회 가입 및 관서지부 창립 발기, 평양 쾌재정에서 연설 ~ 1899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점진학교 설립, 황무지 개간 사업


안창호 선생은 1878년 평안남도에서 3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참 기본적인 정보였는데 처음 알았네요. 11세의 나이에 부친을 여의어 심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더라고요. 학창 시절 서당에서, 개인의 문하에서, 기독교의 근대식 학교에서 학문을 연마한 덕에 훗날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재인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입니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니, 임금과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이것이 첫 번째 유쾌함이요.” - 쾌재정에서의 연설문 중 -


특히 독립협회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평양 쾌재정에서의 대중을 대상으로 연설로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기도 한 1898년 그 해 선생의 나이는 불과 스무 살이었습니다. 저는 그 스무 살 때 군에 입대를 해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점은 선생과 비슷했지만 저는 계급이 낮은 병사였으나 선생은 이미 그 나이대에 이미 대중 연설을 하며 선생으로서의 반열에 오르셨고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어릴 적부터 대단하신 분이셨구나 하는 감탄이 들었습니다.


이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고향 강서군에 초등과정의 점진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충실히 닦았고, 불과 갓 성인이 된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중 연설가로 명성을 떨치고, 학교 설립과 계몽 운동 등 교육사업까지 펼쳤습니다.



1차 도미와 신민회 활동
1902 이혜련과 결혼, 1차 도미 ~ 1903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 조직 및 회장에 피선 ~ 1904 리버사이드로 이주,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 설립, 한인노동주선소(캠프) 설립 ~ 1905 공립협회 창림 및 오대회장에 피선, 공립회관 건립과 공립신보 발간


1902년은 선생에게 특별한 해로, 이혜련 여사와 결혼을 했고 처음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단순히 유학만 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며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한인노동주선소를 설립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한인들의 취업을 위해도 힘썼다는 점입니다. 선생 본인도 26세의 젊은 청년임에도 동포들의 일자리를 위한 조직을 설립한 것인데, 정말 놀랍지 않나요?


여러분 생각해 보시죠.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해외 유학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120년도 더 전에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저 멀리 미국으로 유학을 간 자체로도 험난한 여정일 텐데 첫 해외 생활에서 자신의 역량 계발에 그치지 않고 그곳의 한인들을 지원하는 지도자의 역할까지 하신 것입니다. 선생의 초기 활동에서 이미 그릇의 차원이 다른 큰 인물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광폭 활동을 보여주는 전시물


도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07년에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도 조직하는 등 인재 양성과 구국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을 눈앞에 두고는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재외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는데요. 나라를 위한 진심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활동 아니겠습니까? 광폭 행보에 존경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차 도미 활동과 흥사단 창립
1912 재미 한인을 망라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 ~ 1913 흥사단 창립 ~ 1915 하와이 순방 ~ 1917 멕시코 순방 ~ 1919 대한인국민회 전체 대표자회의 소집, 중앙총회장 명의로 결의안 포고문 발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출발


(미국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교포 노동자들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라.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 - 도산의 말씀 -


그런데 앞선 광폭 행보는 시작에 불과했더라고요. 하와이, 멕시코까지 순방하셨으니까요.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1911년 다시 미국으로 갑니다. 1912년 하와이와 미주 등지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연합회 중앙총회를 조직했고 이후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는데요. 해와 한인의 단결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할 중심기관으로서의 역할, 해외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총지휘할 중앙정부로서의 역할, 그리고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을 증진하는 영사관의 역할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근래의 광복 80주년 특별전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전시에서 "대한인국민회 태극기"를 보았고, '독립과 발명' 특별전에서 미국에서 활동한 발명가이자 독립운동가분들을 보며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대한인국민회의 기능과 역할을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체, "흥사단" 창립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네 맞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잘 나오고 아직도 현존하는 있는 그 흥사단을 안창호 선생이 설립했습니다.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목적을 두고, 동맹수련을 통해 건전한 인격과 강한 단결력을 가진 인물을 양성하고자 했고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결의문 : (좌) 전시관 내 전시된 결의문 (우) 도산공원 내 비치된 결의문 번역문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내외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애국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처럼 한국인 및 한인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과 활동은 한국인들이 자유 국가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한국에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캘리포니아 주 하원이 결의하고, 상원이 동의함에 따라,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2018년 11월 9일 이후 매년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채택하고 선언한다. - '도산 안창호의 날' 번역문 발췌 -


이러한 활동과 공로는 이미 해외에서 인정받았습니다. 2018년 광복절인 8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는 매년 도산 안창호의 탄생일인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채택했으니까 말이죠. 그것도 만장일치로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의 업적을 기린다는 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아시겠지요?



임시정부 활동
1919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통제 실시 및 독립신문 발간 등 활동 ~ 1921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발기 ~ 1923 국민대표회 개최, 부의장에 피선 / 대독립당 결성을 주창, 이상촌 건설 계획 수립 ~ 1924 만주지역답사남경에 동명학원 설립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안창호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대표 자격으로 상해로 가서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주장한 연설을 했고, 미주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해 국내와의 연락기구인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했고,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였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뿔뿔이 활동하던 독립운동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해 개최를 이끌었으나, 성과 없이 끝나자 계파와 노선을 초월한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해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계파의 다툼보다는 민족의 단결과 독립을 우선으로 두고 통합을 위해 애쓰신 모습에서, 위대한 정치가이자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후의 행보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더욱 확신을 했고요.



3차 도미, 옥고와 국내 활동
1925 미주 동포 사회 순방, 한인사회 대동단결과 통일을 역설 ~ 1926 중국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 건설 추진 ~ 1927 민중 연설 중 중국 경찰에 피체, 20여 일 만에 석방 ~ 1930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 1932 윤봉길 의거로 피체로 국내 압송,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 1935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 및 지방 순회,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 ~ 1937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감옥생활에서 얻은 위장병과 간경화 등으로 보석 출감 ~ 1938. 3. 10.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서거,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 1962 건국 공로훈장(대한민국장) 추서 ~ 1973 망우리묘소의 안창호 유해와 LA 이혜련 여사 유해를 합장하여 도산공원으로 이장


1924년 말 선생은 또 한 번 미국으로 가서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의 단결을 역설했고, 서재필 박사와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 정비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중국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확보하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와 동명학원의 운영자금 등을 마련했습니다. 국민대표회 실패 후 많은 독립지사들이 분열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접하고는 독립운동단체 규합의 적기로 판단하여 유일당 원칙에 찬동하는 단체를 모아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 최초의 정당조직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습니다.


그러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가 일어난 4월 29일, 소년동맹단에 기부금을 내기 위해 상해에 있는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을 방문하던 중 일제경찰에 피체되었고 6월 국내로 호송돼 4년 실형을 언도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1935년 2월 가출옥한 뒤에는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습니다. 고된 옥살이 후 몸이 쇠약해진 상황에서 조금 숨고를 시간을 가질 법한데도 선생은 쉬지 않고 오직 독립운동을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더라고요. 헌신에 감사한 마음이 크게 들었습니다.


동우회 활동 및 서거 관련 전시물


국내 흥사단 조직인 수양동우회가 발전한 동우회는 1931년 이후 민족주의 계열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일제는 동우회를 탄압하였고 결국 1937년 회원들을 총 검거하며 동우회는 해산당했습니다.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송태산장에서 은거 중이던 안창호 선생은 결국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미 고령에 접어든 상황에서 옥살이를 하다 위장병과 간경화로 위독해졌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지만 1938년 8월 10일 60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습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안창호가 죽어서 한국이 독립된다면 죽으리라" - 도산의 말씀 -


내가 죽는 건 괜찮은데 사랑하는 동포에게 미안해하는 마음, 내가 죽어서 독립된다면 기꺼이 죽겠다는 선생의 말씀에서 얼마나 진심으로 독립을 바라는지 와닿아서 눈물이 났습니다.



안창호 선생 유품

안창호 유묵 "애기애타"
안창호 수첩 / 안창호가 대전형무소에서 한지를 꼬아 만든 지승 공예품(1933~1935)

기념관에는 안창호 선생의 행보 외에도 유묵 '애기애타'와 수첩 및 지갑류, 대전형무소 옥중에서 한지를 꼬아 만든 지승 공예품, 3차 도미 시절 사용했던 책장 등 다양한 유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묘역 & 동상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는 곧장 안창호 선생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전시실에서 선생의 위대함을 깨닫고는 어서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발길이 이어지긴 했습니다. 모두들 묵념을 먼저 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더라고요. 묘역을 찾은 외국인의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도달하자마자 묘역 앞에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부터 했습니다. 그러고는 묘역 일대에 있는 사진들을 둘러봤습니다.



가족들의 사진들, 그리고 1973년 망우리 묘소의 안창호 유해와 LA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합장하여 이곳으로의 이장과 관련된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보며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서울의 번화가 부근에 온전히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 있다는 점,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이곳을 산책하며 선생을 쉽게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더 많은 애국지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 추도식 사진(1938. 3. 10.)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진은 안창호 선생 서거 해인 1938년 3월 10일 미주 한인사회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 추도식 사진이었습니다. 게양된 태극기 안창호 선생을 애도하는 교민들의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위대한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묘역이 서울시 강남지역의 번화가 근처에 있습니다. 꼭 한 번 찾아, 아니 종종 찾아 감사함을 표현하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도산공원 가운데 지점에 있는 안창호 선생의 동상도 찾았는데요. 마치 저를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꾹꾹 담아 묵념을 했습니다. 공원 일대를 둘러보며 선생과 관련된 말씀들이 표지석으로 혹은 플래카드로 곳곳에 전시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요.



"얼렁얼렁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선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얼렁뚱뚱으로 천년 대업을 이룰 수 있는가"


"서로 약속한 것을 꼭 지켜야 정의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한다고 한 것을 그대로 안 하면 서운한 마음이 생깁니다."


주옥같은, 마음을 울리는 공감 가는 어록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를 보고 나니 1998년 재 개관한 전시관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시할 내용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전시도 안창호 선생의 생애와 활동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점에서 좋습니다만, 안창호 선생의 위대함을 더 널리 느낄 수 있도록 향후 전시실 공간이 확대되어 내용이 보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렇게까지 위대한 인물인 줄 몰랐습니다. 보는 내내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공백과 빈틈이 없었고 오직 조국을 위해 저 멀리 해외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다방면으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셨습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벤처기업가로 다 방면에서 "거성"인 대한민국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제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광복 80주년의 해인 2025년에 우리나라 대표 독립운동가이자 광복의 주역, 현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성에 영향을 끼친 위대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잠들어 계시는 도산공원과 기념관을 찾아 선생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또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광복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지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산공원 및 도산안창호기념관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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