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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관람 후기

독립운동사의 가장 강렬한 사건의 주인공, '장렬천추' 매헌 윤봉길의사

by 곽한솔

어느덧 광복 80주년 서포터즈 “YOUNG:光” 활동의 마지막 달이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활동을 투 트랙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한쪽으로는 대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기념관 방문 후기 콘텐츠를 통한 재 조명을, 다른 한쪽으로 광복 80주년 맞이 특별 전시 및 행사 콘텐츠를 제작해 오는 식으로 말이죠.


11월도 연장 선상에서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대표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을 다음 콘텐츠는 80주년 전시회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그동안의 기념관 방문 콘텐츠를 쌓아보자면, 7월 <백범김구기념관>, 9월 <안중근의사기념관>, 10월 <도산안창호기념관>을 다녀왔고요. 대망의 11월 방문지는 바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김구, 안중근, 안창호와 함께 윤봉길 의사가 대부분의 국민들께 다섯 손가락에 손꼽힐 것인데 반해, 건립된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많은 분들이 수도 서울 소재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존재를 잘 모르기도 하여 이곳을 콘텐츠 주제 장소로 결정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윤봉길의사를 은근히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윤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과 몇 년 전에 알았고, 의거 전 농촌 계몽운동을 펼쳤다는 것도 지난 8월 한 특별전을 통해서 알았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의거 활동도 그 전후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윤봉길 의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 꼭 가고 싶은 기념관이었습니다. 또한 비교적 근래에 재개관을 했다는 점과 기념관이 '매헌시민의 숲'이라는 광활한 힐링 장소에 위치해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방문했습니다.


관람일시 : 하절기(3~10월) 10:00~18:00 / 동절기(11~2월) 10:00~17:00 (종료 30분 전 입장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1월 1일, 5월 1일, 설.추석 연휴

장 소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서울시 서초구 매헌로 99)


저는 이곳을 '서울시민의 숲'이라고 불릴 때 잠시지만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념관의 존재도 알아서 결국 이렇게 오게 된 것인데요. 명칭이 변경된 것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고 주변의 매헌교, 매헌초, 매헌로 등 이름과의 통일성 측면에서 지역구에서 변경을 추진했고 주민과 이용객 등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8%의 동의를 얻어 2022년에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윤봉길의사의 공적과 정신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 숲 역에서 도보로 가까우며, 제가 방문하던 때에는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마침 기념관 바로 앞 정차 정류장이 있는 마을버스가 타이밍 좋게 와서 이를 타고 편하게 도착하였습니다.


기념관 입구 앞에 위치한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표지석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 사나이가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윤봉길의사가 상하이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 남긴 말씀이 새겨진 표지석이 입구 좌측에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글귀로,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기계를 잘 반영한 문장입니다. 글귀를 담은 표지석답게 그 돌 자체도 위풍당당하니 멋있었습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건물 전경

기념관 건물은 층이 높지는 않지만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길이가 길었으며 또한 튼튼한 큰 돌로 이뤄진 몸체에 한옥의 지붕이 조화가 이뤄 역시나 굉장히 멋들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윤봉길의사를 기념하는 곳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맞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건물이 주는 위압감 내지 압도감 덕분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내부로 입장하였습니다.






(중앙홀) 윤봉길의사 좌상

윤봉길의사 좌상
단상에 새겨진 '장부출가생불환'의 문구, 그 아래 윤봉길의사의 농민독본과 어록 속 문구가 기록된 책


백범김구기념관에도 안중근의사기념관에도, 건물 1층 중앙홀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좌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도 태극기 배경의 좌상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는데 역시나 드넓은 중앙홀에 비장하고 웅장한 모습의 윤봉길의사 좌상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그 앞에 서서 참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좌상 단상에 '장부출가생불환'의 문구가 보였고, 그 앞에는 윤봉길 저서 농민독본과 그의 어록 속 문구가 기록된 책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좌상 양쪽의 죽필로 그린 대형 그림 작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좌상 오른쪽에는 윤봉길의사의 농민운동을 주로 엿볼 수 있는 제1전시실이 있는데 그 위에 농민운동 모습을 그린 대형 작품이 있습니다


좌상을 중심으로 왼측에는 상하이의거를, 오른쪽에는 농민운동 모습을 죽필로 그린 대형 그림 작품이 전시돼 있다.


왼쪽의 제2전시실은 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 과정과 성과 및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인데 역시나 위에 상하이의거를 나타낸 대형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후에 전시를 다 보고 나오니 좌상 공간과 양쪽의 대형 그림 작품을 통해 윤봉길의사의 활동 및 활약상을 집약적으로 잘 나타냈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했습니다.


또한, 중앙홀에는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할 만한 디지털영상실과 AR(증강현실) 및 VR(가상현실) 체험, 크로마키 등 최신 영상기법을 활용한 다양한 영상체험 공간 등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잘 활용한 사례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제가 본 기념관이나 전시관 및 박물관 중 중앙홀의 구성이 가장 훌륭했습니다.



(제1전시실) 농촌계몽운동가 활동


매헌윤봉길의사(1908.6.21.~1932.12.19.)

1908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보통학교를 자퇴하다.

1921년 한학과 한시를 배우다. 결혼하다.

1926년 야학을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쓰다.

1930년 독립운동의 듯을 세우고 중국에 가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순국하다.



윤봉길의사 연표

제1전시실에 입장하면 먼저 오른쪽의 연표를 볼 수가 있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윤봉길의사가 1908년에 태어나서 1932년에 돌아가셨다는 것 즉 상하이의거 시 불과 만 24세였다는 것입니다. 짧은 생애임에도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념의 씨앗이 싹트고 ~ 항일의 불꽃이 자라서 ~ 국경을 넘어 ~ 민족의 횃불이 되어 ~ 자유의 세상을 찾다"


앞선 중앙홀에서도 그랬지만 연표 아래의 문장이 윤의사의 생애를 참 잘 요약정리했더라고요. 연표를 찬찬히 다 본 다음 본격적인 전시 관람에 나섰습니다. 윤봉길의사가 농촌계몽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실은 저도 지난 8월에 한 전시에서 윤의사의 농민독본 등 유물을 통해 독립운동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1전시실은 바로 농촌계몽 운동가로서의 윤봉길의 면모를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그 시작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설부터인데요.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농민이었던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후에 농촌계몽 운동을 위해 책을 쓰고 가르치는 활동을 했기에 농민의 아들이었다는 점은 다소 예상외이긴 했는데요. 알고 보니 큰아버지 윤경에게 6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글을 배워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네요. 역시 위대한 인물의 배경에는 위대한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였다는 사실은 여기서 처음 알았네요.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다


11세가 되던 해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가 1919년으로 3.1 운동이 일어났고 윤봉길의 고향 덕산면의 덕산 시장에서도 70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12세의 나이에 이 광경을 본 윤봉길은 일제 식민지 교육을 시키는 보통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 어린이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한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가의 싹이 보였다고 할 수 있겠더라고요.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배움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세 때 유학자 매곡 성주록의 서당에서 사서삼경과 한시를 익혔습니다. 서당 내 시회에서 자주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재능 있었다고 하네요.


전시실에는 제례의 행사 진행순서를 적은 <홀기>, 칠언율시를 중심으로 엮은 시집 <임추>,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의 유명 시를 모아놓은 시집 <염락>, 한학을 공부하면서 멋있고 운치가 그윽한 편지들을 필사한 <순운대편>, 시와 문장이 섞여 있는 시문집 <옥타> 등 윤봉길 유품 책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시집 등 유품
윤봉길이 사용하던 등잔대, 책상, 담배함, 붓 통 / 책상의 책은 윤봉길이 엮은 <한시집>과 위인의 행적을 담은 <국조명신록>
윤봉길이 사용한 놋양푼과 놋대야, 놋수저, 놋그릇, 사기그릇


또한 등잔대, 책상, 담배함, 붓통, 벼루와 연적, 수저와 그릇 등 윤봉길의사가 사용했던 물건이 이렇게 남아있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도 들었습니다. 14세 때 한 시회에서 독장원을 차지한 윤봉길이 지은 칠언율시 <학행>도 전시돼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시에 조예가 깊은지는 미처 몰랐었는데요. 혈기 넘치는 무인의 강력한 이미지였는데, 본래는 시와 책을 쓰는 등 문인의 면모도 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뒤) 윤봉길이 지은 시 <학행> / (앞) 윤봉길이 사용한 연상, 벼루, 연적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밝고 / 선비의 기개 밝고 밝아 만고에 빛나리 / 만고에 맑은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며 / 그 모두가 학행에 있으니 그 이름 스러짐이 없으리 - 윤봉길 <학행> -


스승 성주록은 19세가 되던 윤봉길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며 세상에 나가 더 깊은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는데, 이때 자신의 호인 매곡과 윤봉길이 존경하던 성삼문의 호 매죽헌을 따서 '매헌'이라는 호를 수료 선물로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한 겨울 추위 속에서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고고한 기품과 충의정신을 간직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농촌계몽 운동'을 시작하다

농촌계몽운동에 더욱 열의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무덤 주인을 나타내는 표지물인 묘표가 한자로 적혀있어 아버지의 묘를 찾지 못해 주변의 묘표를 모두 뽑아왔고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윤봉길이 그의 아버지 묘표를 일러주었는데, 문제는 각 묘표가 어느 무덤의 묘표인지를 표시하지 않고 그냥 뽑아왔기에 청년의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 야학 및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했는데, 한글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일깨우는 데 힘을 쏟았고요.


농민독본 저술, 부흥원을 설립하여 증산운동, 마을 공동의 구매조합 설립, 국산품 애용 운동, 생활환경 개선 등 다방면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나아가 독서회와 수암체육회 조직, 특히 월진회를 조직하며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발전시켜 나갔다고 합니다.



'농민독본', 꿈과 이상을 담다

농민독본 제2편과 제3편


20세 윤봉길은 야학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농민독본> 3권을 저술했습니다. 1권은 한글 학습을 위한 '조선글' 편, 2권은 예절과 인사법, 격언 등이 수록된 교육적 목적의 '계몽' 편, 3권은 그의 사상을 담은 '농민의 앞길'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농민독본에는 미풍양속과 교양, 평등사상과 자유사상, 현대문명의 사조 그리고 농본주의와 농민 공동정신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저자 직강을 실시한 윤봉길이라는 인물은 참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았네요.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농민독본에 적혀 있는 문구 전시물
"생명창고의 열쇠는 지구상 어느 나라나 농민이 잡고 있다"
"농민은 양반이 아니다 또 못난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똑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위 농민독본 속 글귀를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오지 않나요? 그 시절에 우리 중 높고 낮은 사람이 없고 평등함을 말했고, 농민에 대해 양반이 아니지만 못난 사람도 아니라고 한 것도 대단했고요. 특히, 농민이 생명창고의 열쇠를 잡고 있다는 말은 표현도 예술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진단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윤봉길은 시인, 작가, 교육가, 농민운동가, 사상가 등 요즘 말로 'N잡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농촌부흥운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다


1928년에는 마을을 부흥한다는 의지를 담아 마을 사람들과 '부흥원'을 지었습니다. 야학당, 월례강연회, 독서회, 월진회 사무소로 사용되며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하는 공간이 되었는데요. 그가 조직한 목계농민회는 농법 개선, 특용작물 재배와 양돈, 양계 등을 장려했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돼지를 무료로 주고 새끼를 낳으면 그 절반은 기본 농민에게, 나머지는 또 다른 농민에게 분양하는 '수내제도'를 만들어 실천했답니다. 또한,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공동판매하고 필요 물품을 공동구매하기도 했습니다.


협동심과 투지, 불굴의 개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운동장으로 만들었고, 이것에서 달리기와 축구 등 각종 운동을 권장하며 청년들의 체력을 단련하고 협동심을 키워나갔습니다.


월진회 관련 전시물

1929년에는 윤봉길의 농촌계몽사상을 실천으로 옮긴 월진회를 창립해 지-덕-체의 실력을 키우고 경제적 자립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주요 사업으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운동

2. 강연회를 통한 애국사상 고취, 지식의 보급화

3. 공동경작과 공동식수를 통한 농촌 경제 향상

4. 축산 등 농가 부업 장려와 소비조합을 통한 농가의 경제생활 향상

5. 위생보건사업과 청소년의 체력 단련을 통한 체력 향상



농촌계몽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기사년 일기


이쯤 되면 과연 윤봉길의사가 언제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인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제1전시실 관람을 70% 가까이 마쳤는데도 아직 독립운동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찰나에 마침내 의문이 풀리는 내용이 시작됐습니다. 1929년 쓴 <기사년 일기>에서는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 운동의 전국 확산과 함흥수리조합 조선인 살해 사건도 쓰여 있습니다.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식민지 현실에 크게 괴로워하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있는데요.


농촌계몽운동으로 식민지 노예의 삶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나면서 중국 망명 결심을 굳혀가게 됩니다.



'장부출가생불환'을 남기고, 압록강을 건너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을 남기고 고향을 떠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기 위해 신의주행 기차를 탔습니다. 하지만 차표 검사원에 의심을 받아 선천역에서 강제로 붙잡혀 모진 취조를 받았고 풀려난 뒤 정주여관에서 머물다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가 친정을 가신다 하여 삼거리까지 따라가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고 가게에서 목에 두르는 큰 수건과 과자를 사드렸습니다. 당일에는 아내가 차려준 마지막 밥상을 물리고 네 살 아들을 안고 볼을 비빈 다음 나가기 전에 아내와 마주쳐 어색하게 "물 한잔 주오"라고 하여 아내가 웃으며 주는 물 한 잔을 주는 것을 받았으나 목이 메어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을 몇 바퀴 돌아보고서는 떠났다네요.


(위) 동생 윤남의(별명 '영석')에게 보내는 편지 / 아래 어머님 전상서와 아들 윤종에게 보내는 편지


전시실에는 후에 중국에서 어머니, 동생, 장남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습니다.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는 '사랑하는 영석아'입니다. 남동생에게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형이 잘 쓰지 않는데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이가 죽으러 가는 길 직전에 가족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애초에 이러한 비극이 왜 찾아왔나 하는 원망의 마음도 들더군요.


윤봉길은 단둥을 거쳐 1930년 4월 천신만고 끝에 칭다오에 도착했습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서 1년을 일했는데 단순히 상하이에 갈 여비를 마련할 뿐 아니라 항일 투쟁을 위해 일본인의 습관과 문화를 익히기 위한 뜻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독립운동에 필요한 지원이라든지 무엇인가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어쩌면 그 가는 길에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직 조국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겠죠?



일제의 만행, '만보산 사건'과 '류탸오거우 사건'

1931년에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만보산 사건'으로 7월 만주 만보산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 문제로 충돌이 났을 때 일제가 한국인이 중국인에 의해 심한 피해를 당한 것처럼 허위 보도하도록 했고, 왜곡 보도를 접한 한국인들이 국내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을 습격해 100여 명을 살해했습니다. 6천여 명의 화교들은 중국으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만주에서는 중국 군인들의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왜구가 한인 무뢰배를 동원하여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까지 닥치는 대로 때려죽였는데 (중략) 고려인의 중국인 타살로 알아 중국인들의 우리에 대한 악감정은 (중략)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 백범일지 중 -


같은 해 9월 18일에는 일제 관동군이 자신들이 관리하던 류탸오거우에 있는 만주철도 노선을 파괴시키고 중국군의 소행이라 발표하며 침략의 구실로 삼은 '류탸오거우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 바로 전년도에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음을 확인한 다음에 대망의 상하이의거를 담은 제2전시실로 이동했습니다.



(제2전시실) 상하이의거


윤봉길은 1931년 6월 23일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인삼 장사를 하고, 이후 교포 박진과 중국인이 운영하는 종품공장(말총으로 만드는 모자와 일용품 제고 공장)에 취직했고요. 김구 선생이 이때 한인거류민단의 지도자로서 가끔 이곳을 방문해 종업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이때부터 윤봉길-김구 두 분의 친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공장 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노동자에 대한 공장주의 착취에 항의하다 해고됐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명을 받았고요, 윤봉길의사는 이봉창의사 의거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있었으며 이는 윤봉길의사의 독립운동 투신 의지가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윤봉길이 백범 김구에게 이봉창 의거와 같은 일로 써달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윤봉길은 3월 무렵 홍커우 공원 근처의 일본인 시장에서 밀가루와 야채 장사를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와 시대 상황을 살피며 거사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윤봉길의사 상하이의거를 전후를 담은 영상


제2전시실은 물론 이 기념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대한독립 그날을 위해'라는 제목의 윤봉길의사의 망명 생활과 의거, 순국에 이르기까지 상하이의거 전후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입니다. 자신의 시계가 더 좋은 것이라며 의거 전 김구 선생과 회중시계를 서로 맞바꾼 유명한 일화도 영상에 담겨있었고요. 의거 전후 관련 부분은 굉장히 감명 깊어서 영상을 쳉 세 번 봤습니다. 여태껏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들 던졌다 정도만 알았는데요. 관동군 대장 한 명만 처단한 것이 아닌 이를 포함하여 일제 수뇌부 총 7명의 사상자를 냈더라고요. 단일 아니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이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일제 수뇌부의 사상 피해, 의거 후 일제의 구타로 피범벅이 된 윤봉길, 순국 직전의 윤봉길, 윤봉길 의사 사진


그런데 이 성과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홍커우 공원과 주변을 사전조사를 철저히 했고, 홍커우에서 이러한 행사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로는 참석자의 사진을 구하여 인물을 얼굴을 익혔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결과입니다. 의거 및 순국 직후의 사진은 여기서 처음 봤는데 의거 직후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나 총살 직전의 모습 사진을 볼 때에는 굉장히 가슴이 아팠습니다. 24세에 불과한 청년이, 그것도 불세출의 뛰어난 역량을 가진 청년이 조국을 위해 단명했기 때문입니다.


수통형 및 도시락형 폭탄 / 윤봉길-김구 회중시계 / 윤봉길 사진, 선서문, 이력서 및 유서

먹먹한 마음을 다잡고 해당 공간의 윤봉길-김구 회중시계와 수통형 및 도시락형 폭탄 모형, 윤봉길 유서와 의거 전 찍은 사진 등 전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잘 모르셨던 분들을 위해 강조드리자면, 윤봉길의사가 던진 것은 수통형 폭탄이며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는데 불발되었다고 합니다.


영상실 공간 전시를 다 둘러본 후 저는 마지막 전시 공간 통로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순국과 유해 봉환

순국 직전 및 직후의 윤봉길의사 모습
상하이의거 시 윤봉길이 지니고 있었던 손수건, 지갑, 중국 화폐와 동전, 도장 등 유품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사형을 미루던 일제는 송호 정전협정으로 군대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1932년 11월 18일 일본으로 압송했고, 윤봉길은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했습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는가?"라는 사형집행관의 말에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으니 강담침착 하였다고 합니다. 상하이의거 당시 몸에 지녔던 그의 물건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일제는 윤봉길 유해를 공동묘지의 관리사무소에서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는 통로에 봉문도 없는 평장으로 비밀리에 매장했습니다. 발굴 전까지 일본인들이 그 묻힌 곳을 밟고 지나다녔던 것입니다.


윤봉길 유해는 국민장 거행 이후 효창원(현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김구는 윤봉길 유해 봉환을 위해 도쿄에 있던 재일한인 거류민단의 박열, 이강훈 등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을 조직했는데 1946년 3월 6일 유해를 찾아냈으며 1946년 5월 15일 부산에 도착했다고, 7월 6일 국민장 거행 이후 지금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 우측부터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묘역, 그리고 안중근 가묘

그렇습니다. 국민 여러분, 윤봉길의사를 포함해 이봉창의사와 백정기의사의 묘역이 효창공원에 있습니다. 효창운동장과 효창공원은 익히 들어본 지명이지만 이 공원에 백범 김구 묘역과 3인의 임정요인 묘역, 삼의사 묘역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많은 분들이 모를 것입니다. 꼭 시간 내어 대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7인의 독립운동가에게 감사의 인사 올리러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삼의사 묘역 가장 왼쪽에는 안중근의사의 가묘도 있습니다. 하루빨리 유해를 찾아 이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편히 잠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의 초석이 된 상하의의거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장제스


중화민국 초대 총통인 그 장제스가 한 저 말 한마디는 소름 돋지 않나요?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콧대가 매우 높은 중국의 총통이, 자책이 담겨 있는 말을 하면서까지 대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영웅 및 명사들에 대한 찬사를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저만한 찬사는 못 들어봤습니다. 장제스의 이 말은 단지 립 서비스가 아님을 다른 전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1968년 장렬함이 천년을 간다는 뜻의 "장렬천추"라고 적힌 유묵을 윤의사 유족에게 전달했고요. 장제스가 동생 윤남의와 아들 윤종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가운데 유묵이 장제스가 윤의사 유족에게 전달한 "장렬천추" 유묵
위에서부터 윤열사 거의기념회 발기취지서, 윤봉길의사 추도사(심산 김창숙의 추도사), 장제스 친필서한과 기념사진(왼쪽부터 동생 윤남의, 장제스, 아들 윤종)

상하이의거는 만보산 사건 등으로 인해 악화된 한중 관계를 복원하여 한중 연합 투쟁의 활로를 열어주었고요. 전 세계 언론이 윤봉길 상하의의거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이를 통해 한국 민족이 해방을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장제스는 찬사를 보낸 것에서 끝낸 것이 아니라,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했습니다. 즉, 카이로 회담은 '한국 해방의 단서'이고 한국의 해방을 보장한 최초의 회의였던 것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의 원인이 윤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윤봉길의 상하이의거가 대한 독립의 초석으로 작용했음에 놀랐습니다. 이 정도로 거대한 파급효과와 성과를 달성한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도마 안중근과 함께 가장 많이 인터넷에 검색되고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매헌 윤봉길이 언급되는지 조금의 의아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앞선 세 분의 활동에 대해서는 교과서를 비롯해 여러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지기도 했으니까요.


윤봉길의사의 경우 상하이의거 외에는 잘 몰랐는데, 바로 그 상하이의거가 이렇게나 길이 남을 역사적인 쾌거였습니다. 단 한 번의 폭탄 투척으로 일본 수뇌부 7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독립의 초석을 닦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전시 관람을 마치고 저는 다시 중앙홀로 돌아와 윤봉길의사 좌상 앞에서 한 번 더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참배를 올렸습니다.



윤봉길의사 동상과 추모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왼쪽 숲길을 따라가면 윤봉길의사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폭탄을 던지는 형상이 아닐까' 하는 예상을 해보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감동적이기도 했고, 윤봉길의사의 삶 전체를 보았을 때 더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단지 일제 수뇌부를 처단했다는 한 행동만으로 윤봉길의사를 국한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 더 적절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동상 가까이 서서 참배를 드렸고요.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뒷모습은 또 폭탄을 던지는 모습처럼 보이더라고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장원 시 학행 표지석 / 천추의열 윤봉길의사 숭모비


기념관에서 동상으로 가는 길에는 윤봉길 의사 장원 시 학행 문장을 새긴 표지석이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기념관 관람을 하지 않았다면 윤봉길 의사가 직접 지은 시인지 어떤 것인지 잘 몰랐을 것 것인데 확실히 인지하고 보았습니다. 상하이의거 61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숭모비도 있습니다. 한자로 "천추의열 윤봉길의사 숭모비"라고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천추의열이란 충절을 뜻합니다.


서울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 숲 역사에 있는 윤봉길의사 흉상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자면, 인근의 서울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 숲 역사 내에는 윤봉길의사 흉상이 있습니다. 흉상과 뒤로는 '장부출가불생환' 문장과 어머니께 보내는 글귀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분이라면 꼭 들르셔서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매헌시민의 숲'은 그 자체로도 힐링 명소로 유명한 곳입니다. 조용하고요. 가을철에는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나무들의 모습도 즐길 수 있습니다. 일대가 굉장히 넓어서 거닐기도 좋고, 한 벤치에 정착해 앉아 사색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바로 옆의 양재천 따라 걸어 나갈 수도 있답니다.






<백범김구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도산안창호기념관> 관람 시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또한 눈물도 흘렸었습니다. 그런데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는 더 감명을 받았고 더 진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는 정도만 알았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무려 7명의 일제 수뇌부를 사상에 빠뜨렸고 독립의 길로 이끈 세계사로 넓혀도 길이길이 손꼽힐, 장제스가 장렬함이 천년을 간다고 평가할 정도로 국외에서 더 찬사를 받은 장엄한 사건을 불과 24세 대한민국의 청년 윤봉길 의사가 해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표 독립운동가들을 어쩌면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우리의 대표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곳에 방문하시어 그의 활동과 정신을 깊이 깨닫는 시간 가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잘 안 알려진 독립운동가를 한 분이라도 알 수 있도록, 아직 끝나지 않은 여러 광복 80주년 특별전 행사에도 방문해 보시길 당부드립니다. 이분들이 있기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고, 80주년이 된 지금 우리나라가 각 분야에서 빛을 내는 강한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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