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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기념하는 곳 《안중근의사기념관》

태산보다 높고 별 보다 빛나는, 영웅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곳

by 곽한솔

광복 80 주년을 맞아 8월 경축식 등의 큰 행사와 <빛을 담은 항일 유산> 등 여러 특별 전시를 다녀왔는데요. 이를 통해 제가 평소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광복 80주년 기념 각종 행사와 전시 속에서 빠지지 않는 그 이름들, 대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에 대해 나는 과연 잘 알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전시들 속에서 위 선생들께서 이러한 말씀과 활동도 하셨었나 하는 것들도 꽤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제 거주지와 직장에서 가까운 서울에 소재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에 한 번도 안 가 봤었기 때문입니다. 그 옆을 수차례 지나가봤음에도 말이죠.


그래서 가봤습니다. 먼저 방문한 남산공원 백범광장 근처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재 "남산과 백범광장"

숭례문 인근 남산공원 입구 / 대한민국과 수도 서울의 대표 랜드마크 한양도성 성곽길과 남산서울타워 전경


먼저 기념관이 있는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드리려 합니다. 대한민국 및 서울의 대표 랜드마크 남산은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는 자리며 국사당이 있던 곳이기도 한데요. 일제는 우리 민족의 의미 있는 장소인 남산 회현자락을 파괴하여 조선신궁을 세웠습니다.


이후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자 이 일대를 독립운동가의 공간으로 조성했습니다. 숭례문에서 가까운 남산공원 입구 계단을 올라 비교적 근래에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길이 나옵니다. 위 성곽 뒤로 남산서울타워가 보이는 장면은 서울의 대표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으로 서울시 홍보대사 BTS가 서울 홍보 포스터 사진으로 찍은 배경이기도 할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 랜드마크이기도 한데요.


100m가 조금 넘는 이 성곽길을 지나면 드넓은 백범광장이 나옵니다. 광장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대한 국민들을 반기고 있지요.


왼쪽부터 성재 이시영 좌상, 백범 김구 동상, 백범광장~기념관 가는 길


광장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2020년 개장한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직전에 조선신궁 배전 터가 있는 자리로 그 반대편에 바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의미 있는 장소를 일제가 자신들을 기념하는 장소로 바꾼 것을, 우리가 다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죠. 이처럼 역사적 서사와 의미가 깊은 곳에 대한 독립운동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한 한양도성유적전시관과 옛 조선신궁 배전 터


개인적으로 백범광장에서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을 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고, 한양도성 남산 구간을 걸으며 조선 신궁 배전 터 그리고 안중근의사기념관 사이를 열 번도 넘게 지났었는데요. 그 길목에 위치 한 안중근 의사 동상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늘 짧은 묵념을 드렸었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물에는 이제야 찾았습니다.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10:00~18:00, 동절기(11월~2월) 10:00~17:00 (종료 1시간 전 입장 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근로자의 날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하고 다음 날)



야외 전시물 및 건물 전경
안중근 의사 동상

기념관에 다다른다고 해서 바로 건물로 입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유묵 속 글귀가 새겨진 표지석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 동상은 제가 알고 있는 동상 중 가장 싱크로율이 높으면서 멋있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저를 쳐다보며, 안일하게 살지 말고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굉장히 멋진 동상입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보물로 지정된 유묵 속 글귀를 새긴 표지석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의 저 유명한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의미의 "국가안위 노심초사" 등 주옥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답니다. 의미를 담은 동상과 표지석이기에 충분히 돌아보시고 건물로 향하면 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묵 표지석

건물은 단지회 12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2010년 서울특별시 건축상 공공건축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건물 앞쪽에는 "한얼"이라 명명된 조형물이 있는데요. '의사님의 이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숭모하는 마음을 이 조형에 담아 드립니다'라는 박유실 작가의 글귀도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건물로 내려가는 통로 우측 벽면에는 역시 안중근 의사의 유묵들이 세로형 돌에 새겨져 나열돼 있습니다. 의미와 아름다움을 모두 사로잡은 볼거리가 이렇게나 많습니다. 기념관 관람을 계획하시는 분들께서는 야외 공간 전시물 관람 시간까지 염두에 두셔야 하겠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물과 한얼 조형물



중앙홀 안중근 좌상


기념관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시실 입구 들어가기 전 중앙홀의 안중근 의사 좌상입니다. 백범김구기념관 중앙홀의 백범 김구 좌상과 모습이 닮아있었습니다. 두 좌상 모두 앞에는 꽃이 뒤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다만, 태극기는 각 인물을 상징하는 다른 태극기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네요. 김구 선생 좌상 뒤 태극기는 <김구 서명문 태극기>, 안중근 의사 좌상 뒤 태극기는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새긴 태극기입니다. 좌상 앞에서 묵념을 드린 뒤 제1전실로 입장했습니다.


설치미술작품 ‘대한군인 안중근'

작가 : 설치미술가 강익중 / 설치 :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중앙홀 좌상에 참배 및 전시실 입장 전, 저는 출입구 왼편의 사물함에 백 원을 투입해 무거운 가방을 보관한 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셨는데요. 짐 보관 사물함이 있다는 것과 자판기 음료 가격대가 시중보다 저렴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자판기 옆 벽면에는 가로 4m, 세로 5m 크기의 대형 설치 미술작품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작가가 안중근 의사의 말씀 80자를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그려놓은 것에서 진정성이 느껴져 뭉클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냥 지나치지 말고 본격적인 관람 전 꼭 이 작품을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1전시실
제1전시실은 안중근 의사 출생 전후의 시대 배경,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안중근 의사 가문의 독립운동 등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상징공간

안중근 의사 상징공간(사진, 부조, 유언)


드라마와 영화 및 연극, 콘서트 등 각종 공연과 마찬가지로 기념관이나 전시관도 오프닝을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관객들이 끝까지 집중력 있게 관람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는데요. 물론 이미 건물 입장 전 야외 조형물 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감을 높였지만, 제1전시실을 입장했을 때의 첫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 부조 그리고 손바닥과 유언이 담긴 화면까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시 관람 본격 시작도 하기 전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네요. 부연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안중근 의사를 상징하는 공간을 단 몇 가지 전시물로 잘 나타난 공간이었습니다.


이를 지나면 안중근 의사의 탄생부터 순국까지의 시기별 행보를 요약한 연대기 게시물을 볼 수 있는데요. 전시 도입 부문에 이렇게 일대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이후 전시 관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돼 좋았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약 30년 짧은 인생임에도 굉장히 위대한 삶을 사셨음을 새삼 느끼기도 했네요.


안중근 의사와 시대적 배경

안중근 의사는 1879년에 태어났는데요. 1875년 일본함 운요호 침범과 그 이듬해 강화도조약 체결부터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성립 그리고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늑약까지, 한 마디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 의사 탄생 전후 30년의 역사 중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잘 정리가 돼 있어, 앞으로 나올 안중근 의사의 행보를 미리 예상할 수 있게 해 준 전시물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가문(국가 서훈을 부여받은 16인)

국가 서훈을 16명이나 받은 안중근 의사 가문

광복 80주년 특별전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에서 본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및 집안 구성원들 중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오빠, 외교관 이범진-이위종 부자도 그랬고요. 특히 대표적으로는 우당 이회영과 이시영 등 형제들을 비롯 그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에 힘쓴 사실 아마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 가문 역시 독립운동 가문의 그 끝판왕 격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 지사가 백범 김구의 비서였다는 것과 안중근의 형제와 사촌 몇몇 분들이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요. 이들뿐만이 아니었는데, 국가 서훈을 받은 가족 구성원이 무려 총 16명이나 됐습니다. 사실 기록이 잘 남겨져 있지 않는 등의 사유로 서훈을 못 받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훨씬 많은 가문의 구성원들이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한 것 아니겠어요?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가문의 수여 현황 /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 사촌 동생 안영근의 활약상

건국훈장 등급이 5등급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최고 1등급 대한민국장을 받으셨답니다. 하긴 안중근 의사가 1등급 못 받으면 누가 받겠습니까? 당연한 결과긴 합니다.

건국훈장 등급(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


등급의 높고 낮음 여부를 떠나 서훈을 받은 모든 독립운동가와 비록 훈장을 수여받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 및 지원하는 활동을 한 모든 안중근 의사 가문 구성원께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 다 기억하면 마땅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사촌 동생 안명근 지사는 꼭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는데요. 뒤의 전시를 통해 안 의사와 편지를 주고받고 또 감옥에 면회를 가는 등 계속 언급이 돼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제2전시실
제2전시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의 삶과 국내에서의 교육·계몽활동, 국외 망명 후 의군 활동과 단지동맹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국내활동

안중근 의사와 천주교 전시물
안중근 의사의 국채보상운동 활동 전시물

안중근 의사는 부친과 일가친척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이는 비단 종교를 가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는 안중근 의사께서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운동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하셨는지는 몰랐었거든요. 괜히 동양평화론이 나온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또한, 더 놀랐던 것은 국채보상운동에서도 단순히 참여한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운동기성회 관서지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부인 김아려 여사 및 가족 구성원들이 패물과 성금 등을 헌납하며 적극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 및 사회 운동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하셨는데 그동안 무장투쟁 활동을 주로 하신 것으로만 알았네요. 부끄러웠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항일운동을 위해 해외로 망명하려 중국 산둥반도 일대와 상하이에 방문했지만 '르 각' 신부와의 만남에서 교육의 진흥이 가장 중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그리고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인해 귀국, 위 학교 설립 및 교육 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펼쳤습니다.


해외활동과 의병투쟁

안중근 의사 활동도
안중근 의사의 연해주 활동과 동의회 창설 관련 전시물

국내 활동을 하던 안 의사는,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후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국내 구국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국외로 망명하게 되는데요. 서울과 부산, 원산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들어가 동포들의 실상을 살펴보고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고 합니다.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안 의사의 모습을 보면서 참 판단력과 실행력이 빼어나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에서도 계몽운동을 벌였는데요. 해조신문에 인심단합론이란 글을 기고, 국권 회복을 위해 연해주 한인사회의 인심 통합과 단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그 시기 연해주에서는 이범진의 군자금 지원에 힘입어 의병운동으로 발전, 안중근 의사는 의병운동가들의 항일의병 결사단체인 "동의회"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군 부대의 국내 진공작전과 포로 해방 관련 조형물
연해주 의병부대의 "관인"과 "기"


1908년 안중근 의사는 동의회가 조직한 연해주 의군 부대의 우영장으로서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여 홍의동 전투 등에서 승전을 거듭했습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에 저도 주목했는데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당시의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뼈아프게도 이 일로 의병부대 위치가 노출되면서 일본 본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네요.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동의단지회(단지동맹)

마침내 나왔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단지회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었는데 이번 기회에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동의단지회가 만들어진 시기의 연해주에서는 의병보다는 계몽운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상황의 변화가 있었고요. 이런 가운데 1909년 초 연해주 크라스키노 카리 마을에서 안중근 의사 등 12인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의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이란 혈서를 썼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잘린 손가락 마디의 모형 전시임에도 무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절대 못했을 것입니다.


연해주 크리스키노에 세운 단지동맹 기념비
대한독립 혈서 태극기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흥, 김백춘,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 안중근 의사 외 11인은 잘 못 들어봐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재해 보았습니다. 단지회가 결성된 장소 연해주 크리스키노에는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광복 80주년 특별전을 통해 항일 및 독립운동 및 한국 전쟁까지, 다양한 모습의 태극기를 봤는데요. 위 혈서 태극기에서 가장 비장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름도 돋았고요. 전시물 보고 통해서 소름 돋은 적이 있기는 했었나 싶네요.



제3전시실
제3전시실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 순국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얼빈 의거 계획 과정에서부터 의거 장면, 법정 투쟁과 뤼순 감옥을 재현해 놓은 공간들이 있으며, 자서전 <동양평화론> 등 각종 저술, 어머니의 말씀과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의연한 순국 장면과 옥중 유묵 등을 볼 수 있습니다.


하얼빈 의거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제3전시실의 첫 게시물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실행 30분 전 전화 내용이었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음성으로도 들을 수 있었고 글씨로도 볼 수 있었는데요. 참 담담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담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는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다음으로는 의거 당일 하얼빈역 현장도와 의거 시 사용한 권총과 총알의 모형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총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총알은 이때 다나카 세이지로가 발에 맞았던 것이 추출되어 일본 헌정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네요.

의거 당일 하얼빈 현장도 / 의거 시 사용한 권총 복제품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그 짧은 시일 동안 동료들과 계획을 세웠는데, 10월 22일에는 우덕순과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 지역 한인회장 김성백의 집에 머물며 그리고 10월 23일 저녁에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조도선을 만나 의거를 함께 하기로 결의했는데 뮤지컬 영웅 넘버로도 유명한 의거 결의를 담은 '장부가'를 이날 밤에 지었다고 합니다.


하얼빈 의거 관련 내용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영상을 저도 모르게 숨죽이며 보게 되더라고요. 어떤 생각을 할 여지없이 그저 그 모습을 보는 데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거에 나선 행동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일본 최고의 지휘관에 총알을 무려 세 발이나 명중시켜 거사를 성공시키다니요. 사실 세 발이나 맞췄다는 것은 이번에 제대로 알았습니다.

하얼빈 의거를 재현한 영상 화면 사진
하얼빈 의거 영상

그런데 뜻밖에도 하얼빈 의거의 실제 영상이 남아 있어 크게 놀랐습니다. 화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계셨기에 안중근 의사인지 육안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VCR에서는 '안중근 의사'라고 자막으로 표기돼 있었습니다. 아마도 포승줄에 묶인 것을 통해 안중근 의사임을 확인한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이때 참았던 눈물이 끝내 나더라고요. 의거의 성공과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 의사께서는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요?


(좌, 2점) 모리 타이지로 궁내부 비서관과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 이사가 맞은 총알 흔적도 (우, 3점) 히토 히로부미가 맞은 총알 흔적도

이토 히로부미 외에도 다나카 세이지로와 모리 타이지로도 피격당했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세이지로의 발에 맞았던 총알이 일본에서 보관 중이기도 합니다. 초대를 포함 내각총리대신을 네 번이나 지낸 거물의 암살 사건이라서 그런지 각국에서 이에 대해 보도했고 수사가 잘 이뤄져서인지 관련 자료가 잘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요. 역사적인 그날의 기록이 잘 남아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의거 후 법적투쟁과 옥중 집필, 순국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투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서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이토를 살해한 후 나는 국제재판에 나가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생각이었다" -하얼빈 의거의 이유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주장-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체포 및 순국까지의 과정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심문과 재판을 매우 빠르게 진행,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한국인 및 외국인 변호사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을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일제가 자신들의 불법성 등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죠. 또한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개인적인 살인 행위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적은 문서

이에 안중근 의사는 저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죄악상을 작성하며 주장했습니다. 일본인 관선 변호사들도 안중근에 대한 사형선고는 부당하다며 적극 변호에 나서기도 했다네요. 인상 깊은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한 달이 더 지난 3월 26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맙니다. 안중근 의사는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한국 독립을 위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잘 아시는 것처럼 많은 유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 / 도요신문 통신원 코마츠 모토고가 받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화질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동지들과 재판을 받는 모습, 빌렘 신부와 안중근-안공근 두 동생을 면회하는 안중근 의사 모습 등 당대의 사진들이 더러 남아있더라고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안 의사의 당시 사진을 보니 반가운 마음과 울컥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끝내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요. 기념관에서는 이처럼 귀한 안중근 의사의 옥중 사진 자료들도 볼 수 있습니다.

동지들과 재판을 받는 안중근 의사(오른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모습)
1910년 3월, 빌렘 신부와 두 동생 안정근-안공근을 면회하는 안중근 의사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어머니가 보내준 한복을 입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직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모습)


안중근 의사는 처형 직전 남길 말이 없냐는 질문에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했으므로 형 집행 관리들도 한일 간의 화합으로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제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한일 간의 화합과 평화를 마지막에 고하신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나 큰 인물이셨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독립운동가가 누군지 묻는다면, 누구라도 손에 꼽히는 그는 민족의 영웅입니다.



기획전시실(옥중 유묵) & 체험실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

1910년 2월과 3월 뤼순감옥 내에서 쓴 유묵 62점 중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것이 30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 대목만으로도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네요. 전시관 입장 전 봤던 야외 표지석과 벽면 돌에 새겨진 글씨의 동일한 유묵이 이곳 기획전시실에 전시 중입니다. 대부분이 복제품이지만 안중근 의사의 귀한 유묵을 한곳에서 몰아볼 수 있는 전시실입니다.


이외에도 안중근 유묵 및 기념관 우편 스탬프 찍어보기 등 체험을 할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체험전시실"이 있고요. 안중근 의사에 관한 도서와 의류, 문구류, 유묵 복제품 등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뮤지엄샵"도 있으니 관심 있으시다면 적극 이용 바랍니다.

안중근 유묵 찍어보기 공간과 직접 찍은 유묵 글귀
안중근 의사 관련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뮤지엄숍"




안중근의사기념관은 구성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건물 입장 전 안중근 동상 및 안중근 유묵 표지석 관람, 기념관 입장 후 중앙홀의 안중근 의사 좌상 참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 전시의 시작을 안중근 의사를 상징하는 공간 및 당대의 시대적 배경,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가문 이야기로 출발하였고요.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기를 볼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귀한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과 체험도 해볼 수 있으며 관련 기념품도 구경할 수도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었고, 잘 몰랐었지만 기념관 방문을 통해 이제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광복 80주년인 올해, 적어도 광복을 위해 크게 헌신하고 희생하신 대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곳에 가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감사함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매우 적합한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죠. 제가 직접 가보고 안중근 의사에 대해 더 잘 알고 나니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서울타워


여러분들도 광복 80주년을 맞은 2025년이 끝나기 전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 관람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통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 가져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보너스로 기념관과 연계해 백범광장의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 한양도성 성곽과 남산 산책 및 서울 도심 경관 감상까지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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