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발명과 그 수익 지원을 통한 독립운동
광복 80주년 서포터즈 “YOUNG:光” 곽한솔입니다. 지난 8월 광복절 경축식을 포함 큰 국가적 행사와 함께,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우리들의 태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들의 광복절>, <빛을 담은 항일운동> 등 다수의 특별 전시전도 다녀왔는데요. 광화문 광장 일대를 그렇게도 다녀와봤고 그곳의 존재도 잘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안 가봤으며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여러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상설전시 <역사관>, 특별전시로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과 광복 80주년·발명의 날 60주년 기념 특허청 순회전 <독립과 발명>까지 열리고 있어 꽤 오랜 시간 동안 전시를 관람했는데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별전시(3층) :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11. 16.) / 독립과 발명(~10. 14.)
위 특별전시 중 제게 새롭고 강렬한 깨달음을 안겼던 <독립과 발명> 관람 이야기를 이번에 나누고자 합니다.
관람기간 : 2025.06.30.(월) ~ 2025. 10.14.(10:00 - 18:00 (수, 토 :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장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
관람내용 : 독립유공 발명가 5인의 생애와 대표 발명품
“독립과 발명이 무슨 연관 관계가 있지? 항일 무장 투쟁에 쓰인 총기나 폭탄 등 무기를 발명했다는 건가?”
전시를 보기 전 저는 무장투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발명품일까 하는 협소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본 전시를 보니 “아” 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바로 전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광복 80주년·발명의 날 60주년 특별전
전시를 열며
광복 80주년·발명의 날 60주년을 맞아, 지식과 기술로 조국의 자립을 실현하고자 했던 독립유공 발명가 다섯 분의 대표 발명품을 소개합니다. 이번 전시는 발명이 단순한 생계의 수단을 넘어 독립 정신을 실현하는 도구였던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또한 발명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헌신을 되새기며, 창의와 실용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전하는 가치를 나누고자 합니다.
<강영승> 실용을 품은 교육자, 독립을 설계한 발명가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난 강영승 선생은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해 이민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미주 지역에서 학생양성소 감독과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는 교육 활동에 힘썼습니다. 강영승 선생은 설탕 없이 단맛을 내는 사탕 제조법을 발명하여 미국 특허를 출원하고, 1936년 정식 등록받았습니다. 한국의 엿 제조 원리를 응용한 이 기술은 시카고에서 실제로 판매되었으며, <신한민보> 및 당시 흥사단 자료에 따르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식품 관련 발명을 통해 특허를 등록하고, 이를 사업화하여 얻은 수익을 독립운동에 활용했습니다. 그의 공로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누리집)
소개해 드릴 첫 번째 인물은 하와이에 노동자로서 이주해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한 강영승 선생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엿 제조 원리를 응용한 기술을 활용해 특허 기술을 받았다는 점이 대단히 인상 깊었습니다.
무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크게 호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K-POP, K-FOOD 등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은 90여 년 전 한국의 기술로 발명 및 특허 분야에서 그것도 초강대국 미국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외에도 콩나물 통조림 방식을 구상하는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발명을 통해 번 돈을 기꺼이 독립운동 지원금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좀 더 알아보니 수익 지원 외에도 시카고 지방회가 설치한 시국연구위원회에서 독립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고, 여러 애국단체 조직에서 활동하는 등 다방면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셨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공을 인정받아 건국헌장 애국장을 추서 받으셨는데요. 배우자 강원신 선생 역시 훗날 건국헌장 재족장을 수여받은 독립운동가로 부부 모두가 함께 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발명은 한국의 맛이었고, 독립의 길이었다"라는 전시 게시물의 이 멋있는 글귀가 딱 들어맞는 독립운동가이자 발명가 강용승 선생입니다.
<권도인> 하와이에서 펼친 발명의 날개, 조국을 품다
1888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나 1905년, 대한제국이 외세에 시달리던 시기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습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며, 1910년 대한인국민회 콜로아지방회 회장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를 결속시키고 가구점을 경영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권도인 선생은 1939년 펼치고 접을 수 있는 정밀한 레일 구조의 대나무 커튼을 고안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이 커튼은 얇고 잘게 쪼갠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 통풍과 차광 기능이 뛰어났으며, 습도와 햇빛에 강해 하와이의 기후에 적합한 생활 발명품이었습니다. 그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일상의 기술로 이어졌으며,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발명은 개인적인 이익이 아닌 조국의 해방을 위한 실천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4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권도인 선생 역시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와이 노동 이민자로 해외에 간 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열악한 환경의 타국에서 빛나는 행보를 걸으셨습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하며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셨으면 그저 윤택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실 수 있었을 텐데 개인의 이익 추구보다 나라를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더라고요.
선생이 아니었으면 윤봉길·안중근, 전명운·장인환 열사의 의거 활동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총탄을 가지고 목숨을 바치는 것도 저로서는 하기 힘든 일인데 그에 못지않게 힘든 일이 바로 제가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는 것이거든요. 깊은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고 2004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꼭 권도인 선생의 묘역을 찾겠습니다. 그의 아내 이희경 선생도 미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해 서울에서 3·1 운동을 조직하고 직접 참여해 옥살이까지 한 위대한 여성 독립운동가 셨더라고요.
왜 이제야 서야 알았을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은 권도인 선생이 지원이 있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유명 독립운동가들과 동일선상에서 선생이 널리 후손들에게 존경받아야만 할 분입니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발명가 독립운동가
강영승, 권도인 두 분은 참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모두 1888년 대한민국 태생으로, 하와이 이주 노동자로 시작해 미국에서 발명을 통해 특허를 출원했으며 타국인 미국에서 자금 지원을 포함 독립운동을 펼쳤고 돌아가실 때까지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저 멀리 타국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도 지켜보셨을 테죠. 두 발명가를 알게 되고 나서는, 타국에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신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가져나가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박영로> 낯선 땅에서 피운 혁신
1914년 미국으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다뉴바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흥사단 단원으로 추천되어 안창호 선생에게 인도되었고, 1915년에는 회계대리로 이름이 기재된 재정 지출 문서를 남겼습니다. 1919년에는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에서 서기로 근무하며 일본의 식민 선전에 대응했고, 같은 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525달러의 독립 의연금을 송금했습니다. 이 기록은 공식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박영로 선생은 해외에서 독립운동과 발명 활동을 병행하며 조국을 위한 실천을 이어간 인물이었습니다.
강영승, 권도인 선생과 마찬가지로 박영로 선생 역시 타국인 미국, 도산 안창호 선생이 활동했던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활동한 발명가 독립운동가입니다. 그의 발명품 낚싯대로 실용품이었습니다. 생계형 어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쉬운 것은 다른 분들은 화질은 안 좋지만 사진 한 장씩은 있었는데, 박영로 선생 사진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나마 흥사단 단원이며 대한인국민회에 독립 의연금을 송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참 다행이네요.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타국에서 말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했었을 텐데 이를 우리는 잘 몰랐을 테니까요.
그리고 새삼, 알려지지 않은 이름 모를 수많은 항일 및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타국의 땅에서 조직 활동 및 발명과 그 수익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박영로 선생의 행적이 널리 알려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아직 잘 혹은 아예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들이 발굴돼 알려지길 소망하겠습니다. 끝끝내 알려지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연송> 글과 도구로 지킨 조국의 뜻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한 후 발명과 사상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자유장,이중봉침,공중회전팽이,무연료 원동력 환동기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발명하여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또한 「선(善)과 도(盜)」, 「사우(詞牛)가 시문(詩文)을 쓴다」 등의 글을 집필하여 인간사회 개혁과 조선 독립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저작 활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독립운동가이자 발명가로서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일본 유학파 발명가 장연송 선생은 주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발명을 하셨더라고요. 대표 발명품 자유장은 접이식 의자, 양산, 척후봉 등 장치가 포함된 다기능 장치로 굉장히 창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용도 물품을 저 시대에 발명했다는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고요.
선생은 이외에도 이중봉침, 공중회전팽이 등 다양한 실생활품을 많이 발명했는데 참 사려 깊은 발명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은 발명뿐만 아니라 조선 독립에 대한 희망을 글로 표현하는 저작 활동도 했는데,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답니다. 그런데 전시관에서의 정보는 적어서 이후에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해 온라인 검색을 통해 찾아봤는데요.
해방 이후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됐고 폐암이 발병돼 1956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 나라를 위해 사명을 다하고자 했으나 민족의 비극인 한국 전쟁으로 비극을 겪은 장연송 선생을 우리 후손들이 많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장연송 그리고 조소앙 선생처럼 납북 등 이유로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행적 소개가 미비했는데 널리 알리지 못할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많이 알려져야만 하겠습니다.
<정인호> 발명을 통한 자립 실현, 특허로 지킨 독립의 뜻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정인호 선생은 청도 군수직을 내려놓고 초등 대한역사를 편찬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에 힘썼습니다. 일제의 침탈이 거세지던 시기에도 자신의 발명을 지키기 위해 특허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1909년 말총모자로 통감부 특허 제133호를 취득하여 한국인 최초의 공식 특허권자가 되었습니다. 말총모자는 말의 털을 소재로 제작된 얇고 섬세한 발명품으로, 형태 유지와 물 세척에 강했습니다. 이후 말총을 활용한 핸드백, 셔츠 등을 개발·수출하며 실용 발명을 통해 기술과 산업을 통한 자립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정인호 선생은 이러한 활동으로 마련한 기반을 활용해 대한독립구국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송금 활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한국인 제1호 특허품은 바로 정인호 선생의 말총 모자입니다. 이번 전시의 다른 특허 전시품은 그림이나 판넬 혹은 모형으로 축소해 전시돼 있어 많이 아쉬웠는데, 말총모자는 실제 그대로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는 거랑 실물을 보는 건 확실히 다르더군요. 지금 봐도 촌스럽다는 생각보다는 클래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티지 혹은 복고풍 패션 아이템으로 언젠가 다시 유행할 법도 했고요. 그만큼 모자 자체가 예뻤습니다. 괜히 당대의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고 수출까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 역시 이로 인해 얻은 수익을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지원하는 등 결국엔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발명으로 수익이 생겼으니 독립운동자금 지원 활동을 하겠다 이전에, 독립운동자금 지원 활동을 위해 발명을 하신 정인호 선생과 앞선 발명운동가 독립운동가분들 모두 우리 후손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1869년 태생인 선생이 76세에 사망하셨기에 단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가 1945년 1월로 광복을 보지 못하셨다는 점은 실로 안타까웠습니다.
무장투쟁을 위한 발명품인가?라고 생각했던 제가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전시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발명을 통해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 지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좋은 사업 및 활동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이 되느냐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내 돈을 선뜻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 수익으로 자손들과 떵떵거리며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테고요. 단순히 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활동 역시 적발 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위 발명가분들이 실로 위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잘 기억하면서, 어떻게 권총과 폭탄을 마련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임시정부 건물 및 독립운동가의 거처가 끊임없이 마련됐던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수많은 이들의 독립 자금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바로 이들 발명가들이 여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독립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자금을 마련한 위 발명가 독립운동가분들이 대단히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 대해서는 저평가도 아니고 평가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굉장히 슬펐습니다. 이분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안중근·윤봉길 의사의 의거 활동과 전명운·장인환의 의거 등 성과도 없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특허청의 순회 전시 특성상 전시 공간은 협소했습니다. 하지만 발명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다섯 분의 이야기는 제게 큰 울림이었습니다.
작지만 강하며 의미가 깊은, 광복 80주년 & 발명의 날 60주년 기념 <독립과 발명> 특별전이 이제 한 달 남았습니다. 80년 전 광복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었던 발명가들을 꼭 만나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