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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한솔 Dec 16. 2022

이 돌은 무엇인고?! <동대문구 소재 표지석>

성동역 터, 보제원 터, 휘경원 터, 영우원 터

조선의 궁궐이 있고, 근현대사 적으로 많은 활동이 있었던 지역인 종로구와 인근의 성북구 및 중구에는 과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이 있었음을 표시하는 표지석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동대문구에도 표지석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무심코 지나가면 인지하기가 쉽지 않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쳤던 시설과 묘지 등이 있었던 곳에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성동역 터 표지석 - 경춘선의 시.종착지, 성동역

(2004. 12. 설치 / 동대문구 제기동)

성동역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경춘 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 경춘선의 출발역으로 광복 후 국유화되었다. 19070년대 출발역이 청량리역으로 이전하고 건물이 헐리기 전까지 30여 년간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과 농산물을 실은 화차가 성동역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경춘선의 시·종착역이 지금은 청량리동에 있는 청량리역이다. 그런데 “원래 경춘선의 서울 출발 지점이 제기동에 있었다고?”


서울특별시 제기동역 2번 출구 주변 길은, 경동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매우 혼잡한 거리다.

 바로 그 인근 ‘한솔동의보감’ 건물 앞 보도에 “성동역 터” 글귀가 새겨진 돌이 있다. 혼잡한 거리, 차도 방면에 돌이 있어 무심코 지나가면 이 돌의 존재 자체를 알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939년부터 약 30년간 이곳에, 경춘선의 출발역인 성동역이 있었던 것을 알리는 표지석인데요.


“성동”이라는 역명은 지금의 성동구와는 무관하며 성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사설 철도였다는 특성이 있었고, 국유철도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 1971년에 이르러 성동역은 서울의 시가지 확장 계획에 따라 폐쇄됐다.

사진출처 : (좌)연합이매진(나무위키 게재) / (우) 동대문구 기억여행 홈페이지


당시 경춘선 시·종착역인 성동역이 있었기에, 현재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이 형성되고 서울 최대 재래시장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동역의 옛 사진을 보니, 사라져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그래도 이렇게 표지석으로나마 성동역의 흔적을 남긴 것은 다행이다.


가족과 지인, 특히 아이들과 이 비석 옆을 지나간다면 성동역이 있었던 자리임을 그리고 오늘날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이 번성하게 되는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알려주셔도 좋겠다.


“원래 경춘선의 서울 출발 지점이 제기동에? 있었다!”



보제원 터 표지석 - 애민과 구휼기관의 상징, 보제원

(1987. 12. 설치 / 동대문구 제기동)

1393-1895년 여행자의 무료숙박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

안암오거리에서 제기동성당으로 가는 방면 버스정류장 근처 보도에는 표지석 하나가 있는데. 역시나 잘 인지하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가기가 쉽다. 이는 바로 보제원 터 표지석이다.

글귀를 보면 무려 1393년부터 1895년, 그러니까 무려 500년 동안 이곳에 보제원이 있었던 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로가 발달되면서 생겨난 원(院)은 주로 공용 여행자의 숙소 및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역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 근처의 원은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그리고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었다고 한다. 보제원이란 명칭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구휼기관의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공용 여행자에게 숙식 제공은 물론,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한의원과 의좌, 간사회 등을 배치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진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주로 도성 내 병자의 구료를 주 업무로 했지만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를 구료 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사망 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으로서의 역할까지 했다고. 이는 세종실록 등 문헌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흥인문밖에 보제원, 소의 문 밖에 홍제원을 설치하고 배고픈 이들의 진제장(賑濟場)으로 사용하고자 토자(土字) 형태로 2칸을 지었다” 세종실록 중

“굶주린 백성을 보제원과 홍제원에 나누어 진휼하도록 하라”, 세종 69권

“윤봉과 장정안이 두목 42명을 거느리고 함길도를 향해 떠나니, 좌대언 김종서에게 명하여 의정부·육조와 같이 보제원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세종 53권
(출처 : 동대문구 문화관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옛날부터 보제원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이 지역 일대에는 경기도, 강원도 쪽에서 한약재를 채취해 파는 약재 상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보제원이 위치했던 지역의 근 거리에 서울약령시가 위치하여 번창하게 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식량과 의료를 베풀어 희망을 전달하던 보제원의 생명존중 정신이 지금까지 약령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동대문구 문화관광 홈페이지)


아픈 백성에 진료를, 가난한 백성에게는 식량을 제공해 주었던 보제원. 너무 좋은 기관 아닌가!? 보제원의 역할을 오늘날에도 서울약령시가 있는 동대문구에서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휘경원 터 표지석 - 순조의 생모 유빈 박 씨의 묘, 휘경원

(2016. 4. 설치 / 동대문구 휘경동)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유빈 박 씨(1770-188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정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 휘경중학교에도 표지석 하나가 있다. 이곳은 바로 순조의 생모인 유빈 박 씨의 무덤이 있었던 휘경원이 있던 자리다.


비록 지금 외형적인 흔적은 사라졌지만, 여러분들께서 짐작하시는 것과 같이 휘경동 등 지명이 바로 이 휘경원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외형이 없는데도 그 명칭으로서 오늘날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때문에 역시나 이러한 표지석으로 그 흔적을 남긴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영우원 터 표지석 -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

(2019. 12. 설치 / 동대문구 휘경동)

'영우원 터'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이 터에는 삼육서울병원 본관(동대문구 망우로 82)이 자리하고 있다.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양력 7월 4일)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째인 윤 5월 21일(양력 7월 12일) 27세로 사망했다. 이에 영조는 시호를 사도, 묘호를 수은으로 내리고 양주 배봉산 언덕(현 동대문구 휘경동)에 묘를 조성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현으로 올리고, 묘를 격상하여 영우원으로 봉원했다. 정조 13년(1789) 10월 7일(양력 11월 23일)에 경기도 화성 현륭원(현재는 융릉)으로 이장한 뒤 그 자리에 배봉진을 설치하여 영우원 터를 보호했다.

동대문구에는 조선 왕실의 무덤이 있거나 있었던 곳이 많다. 영휘원과 숭인원이 현재 남아있고, 과거에는 홍릉과 휘경원 그리고 그 근처 삼육서울병원 내 삼육보건대학교 건물 주변 일대에는 영우원이 있었다.


역사적 비극의 인물, 정조의 아버지이자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던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바로 그 사도세자의 묘가 있던 자리가 영우원 터이다.


현재 표지석은 실제 영우원의 터 자리가 아닌, 그 인근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배봉산 둘레길에 위치하고 있다. 영우원 터와 조금 떨어진 위치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근처에 영우원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휘경원과 마찬가지로 영우원 역시 동대문구 지명 유래에 영향을 미쳤다. 배봉산의 "배봉(排捧)"이라는 명칭이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에 절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와 안암오거리 일대는 동대문 구민뿐만 아니라 타 지역 거주민 이시라도 한 번쯤은 다녀본 길일 것이다.


무심결에 지나가셔서 "성동역 터" 표지석과 "보제원 터"의 표지석을 인지하지 못했던 분들이 상당수  것이라는 생각이 다. 이 글을 보셨다면, 이제는 그 돌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표지석에 대한 유래와 의미를 가족과 지인분들과도 나누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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