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사회에서 놓치기 쉬운 것들
오늘 조금 전 헬스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길거리에서 인터넷도 안 되는 폴더폰을 들고 소리치며 울고 있었다.
"아빠, 이게 말이 돼? 아빠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작은 소녀는 전화기 너머 아버지와 다투고 있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절박한 말투는 주변 소음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강하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순한 한 장면이 아니라, 그 아이가 처한 환경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압박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대치동이다. 교육열로 유명한 동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공부나 진로 문제로 부모와 갈등을 겪는 아이들은 많다. 성적, 진로, 비교. 아이들에게 충분히 여유를 줄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아이와 부모 간의 대립은 쉽게 생긴다. 그리고 그런 대화는 종종 ‘대화’라기보다 일방적인 ‘설득’이나 ‘명령’이 되기 쉽다.
학창 시절 중 나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부모님이 나를 학원에 보냈을 때 시작되었다. 나는 학원을 며칠 다녀보고는 곧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고, 어떤 개념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학원 수업은 빠르게 진도를 나갔고, 나는 늘 이전 챕터에 머무르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학원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고, 어느 날 학원에서 부모님께 연락이 가면서 발각됐다.
그때 부모님은 내가 왜 학원에 안 나갔는지를 물어봤다. 나는 그 이유를 위와 같이 설명했고, 부모님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셨다. 이후로 나는 학원에서 자유로워졌고, 내 방식대로 학습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공부를 혼자 했다기보다는, ‘스스로 학습하는 방식’을 존중받았고, 그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공부하고 고민했던 경험은 지금까지도 내 선택의 기준과 동기가 되어주고 있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에 바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더 나은 삶, 더 안정된 길, 더 높은 가능성. 때로는 그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더 유명한 학교에 가는 것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 돼."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작 그 말 뒤에는, ‘그래도 내가 바라는 길로 갔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숨어 있는 것만 같다.
부모가 판사라고 해서 자녀가 법조인의 길을 가야 할 이유는 없다. 부모가 의사였다고 해서, 자녀가 같은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를 나왔다고 해서, 자녀도 서울대를 가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 논리는 언뜻 보면 부정하기 어려운 보편론이다. "공부를 잘하는 게 못하는 것보다 낫다", "지방대보단 서울대가 낫다"는 식의 당위. 하지만 삶은 수학의 명제가 아니다. 인간의 행복은 ‘A이면 B이다’로 풀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동기와 흥미, 재능에서 비롯된 경우, 분명한 복을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그 길이 공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자녀를 바라본다. 마치 인생 2회 차를 사는 듯이, 과거 자신의 아쉬움을 자녀를 통해 해소하려는 시도. 그것이 과연 자녀에게 도움이 될까. 정작 자녀는 스스로가 어떤 길을 원하는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부모의 기대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오늘 길에서 본 아이처럼.
사회는 점점 개인의 행복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일본, 유럽, 북미만 봐도, 교육은 단일한 척도가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경쟁은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고, 개인을 성장시킨다. 하지만 그 경쟁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것이어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아이에게는, 그 모든 경쟁이 고통이자 불안이다.
거리에서 소리치며 울던 아이는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너무 힘들다'는 신호.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신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요즘 애들은 유난이다", "우리 때는 더했다." 그런 말들은 종종 아이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내뱉는 신호는 ‘나 힘들어, 잠깐 쉴게’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건 정말 나와 맞지 않아’라는 절박한 외침일 수도 있다. 그 둘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 미묘한 차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읽어야 하는 사람은 보호자다. 잠깐의 지침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 필요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공감, 그리고 세심한 관찰의 영역이다.
노력은 훈육과 강요가 아니라, 관심과 흥미, 그리고 목적의식에서 비롯된다. 자녀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일 때, 그에 맞춰 지원해 주는 것. 그게 진짜 교육이고, 부모의 역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들과 자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 아이가 요리를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다만 나는 그 아이가 ‘노력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일정 시기에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 등 공부를 10시간, 15시간 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운동을 10시간 하거나, 요리를 10시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노력 없는 결과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길이든 기꺼이 응원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양육방식은 단지 부모의 배경이나 금전적 여유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부모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복을 어디서 정의하느냐의 프레임이 그 양육의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믿는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가정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인내와 복잡한 고민을 요구할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말로는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완벽한 방향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결국 이론이 아닌 현실의 영역이기에, 누구도 쉽게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렵다. 정답은 없고, 다만 오늘보다 내일 더 고민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루씩, 부모도 아이도 함께 자라는 것 아닐까. 부모도 어른이라 불리지만, 결국 자녀와 함께 자라는 존재다.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실수를 인정하며 바로잡을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부모도 실수한다. 하지만 그 실수 하나로 자녀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작고 무심한 실수들이 반복되고, 일관되게 누적될 때 생긴다.
그래서 부모에게도 성장이 필요하고, 그 성장이 자녀에게는 곧 보호막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