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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Sep 10. 2023

뫼비우스의 시작점

살림 1-2 현관

나는 우리 집 현관이 만만했으면 좋겠다. 입이 쩍 벌어지는 장식이나 반짝이는 타일은 없어도 위화감 없이 들어올 수 있으며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설 수 있는 장소였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입주 때부터 있던 바닥돌은 그대로 둔 채 벽과 천장만 하얗게 칠해 편안하면서도 환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신발은 가능하면 신발장에 넣거나 가지런히 정리하며 키가 어중간한 화분을 두어 시선을 상쾌하게 한다. 드나들면서 비질을 자주 하는 편이고 열린 현관문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알아도 몰라도 먼저 밝게 인사를 한다.


참. 우리 집은 1층이다. 그래서 인사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현관문도 자주 열어 놓으니 눈도 잘 마주치고 게다가 화단에 갖가지 꽃이 많아 잠시 구경해도 되냐는 이웃도 있다.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조심이 먼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보는 사이에 현관 구경 좀 시켜주는 게 무에 큰일일까 싶다. 그러면서 얼굴도 사귀고 안부도 묻는다. 특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몇 초는 내가 현관문을 여는 시간과 비슷하여 눈빛과 인사를 나누기에 적당하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은 없고 쌀 포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13층 할머니가 깜빡하셨나?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포대에 붙은 쪽지가 눈에 띄었다. 봉지도 안 뜯은 건데 벌레가 난 것 같다며 나눔 하고 싶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바로 가지고 들어와 쌀을 씻어 불렸다. 다음 날 방앗간에서 가래떡으로 뽑았다. 그리곤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었다. 물론 현관문을 열고서.


누가 놓고 갔다고 호수라도 적어 놓았으면 배달했을 텐데 그걸 모르니 대신 우리 집 현관문에 쪽지를 붙였다. 마치 방을 붙이듯. 놓고 가신 쌀은 떡 해서 잘 나누어 먹었다고 인사말을 적었는데 보셨는지 안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보셨다고 믿는 게 좋을 것 같다. 며칠 동안 엘리베이터를 한 번은 타셨겠지. 못 보셨어도 우리 모두 즐겁게 잔치하듯 먹었으니 감사한 마음 가득이다. 그 기운이 나의 현관을 통해 엘리베이터도 탔을 것이고 우리 라인 모든 집에 다 번졌을 것이다. 좋은 기운은 그렇게 잘 퍼진다고 배웠다.


아예 우리 집 현관 문고리에 상추를 걸어 놓고 가시는 분도 있다. 처음엔 상추 몇 포기로 시작하시더니 치커리, 쑥갓, 비트, 시금치 등 종류와 양이 늘어났다. 매년 여름 우리 식탁은 그분 덕분에 푸성귀가 넘쳐난다. 그 이유는 상추 잘 먹었다며 꾸벅 인사한 둘째 덕분이다. 이분은 "이 집 둘째는 어쩜 그렇게 인사도 잘해? 상추도 잘 먹는다며? 이뻐 죽겠어~!"라고 하시면서 해마다 때마다 상추_산타_할머니가 되신다. 둘째는 상추산타할머니만 보면 더 꾸벅 인사하고 그럴수록 문고리 상추 봉지는 점점 더 불룩해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인사하고 나누는 그 과정에 시발점이 어딘지 따지는 건 의미도 없거니와 밝히기도 어렵다. 그러니 뫼비우스의 띠라고 할 수밖에. 다만 이 좋은 기운들이 1층 나의 집 현관을 (엄밀히 말하자면 공동현관이지만) 드나든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현관문 바깥쪽도 반들반들하게 닦는다.


여기에 덤 하나. 신발을 정리하며 비질할 때 현관문을 열고 쓸다가 공동현관 밖에까지 먼지를 털고 나면 "젊은 사람이 살림도 잘하네~!"라는 칭찬까지 받을 수 있다. 우리 집 거실이 어느 정도로 폭탄을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관만 깨끗하면 살림 잘하는 젊은 사람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다. 덤 치고는 아주 남는 장사다.


웃어서 복이 들어오는지 복이 들어와서 웃는지 밝힐 수 없는 것처럼 현관도 마찬가지다. 드나드는 이들의 안락함과 현관의 편안함은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인 것처럼 동시에 존재한다. 굳이 시작점을 찾자면 빗자루를 들고 있는 내가 '뫼비우스'의 글자 중 'ㅁ'(미음)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살림은 내가 하는 거니까. 그러니 나는 오늘 아침에도 문을 열고 쓱쓱 싹싹 현관을 쓸었다. 아침 세수를 하듯 뫼비우스의 시작점을 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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