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와 그의 아내 - 10
"미칼라가 울어서 우리가 살았어."
이 한 마디로 우리는 연탄 때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빠가 울산에서 신혼살림을 할 때였고, 아빠는 고려아연 공장을 짓는 공사장에서 일했었다.
신혼살림이라고 해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살림과는 많이 달랐을 그 시절...
아빠는 부엌 바닥에서 눈을 떴다. 이게 뭔가 싶어 눈을 한 번 더 감았다가 떴다.
미칼라의 울음소리다.
"평소엔 잘 들리지도 않던 네 울음소리가 막 들리는 거야. '응애~ 응애~'하는데 정신이 딱 들었어. 그래서 둘러보니 부엌 바닥에 내가 엎어져 있더라고. 얼른 니네 엄마부터 찾았지. 방에서 정신을 놨더라구. 아무리 흔들어도 니네 엄마가 깨어나질 않는 거야."
아빠는 말을 이어가면서 점점 그 기억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도움을 청하려고 밖으로 기어 나왔어. 거기가 세 길 정도 되는 언덕이었는데 내가 거길 굴러서 내려간 거야. 떨어진 거지 뭐. 그래서 도로까지 엉금엉금 기어 나갔더니 택시가 서더라구. 그 택시 기사가 도와줘서 니네 엄마랑 너랑 태우고 울산 시내 병원으로 출발한 거지."
시내로 가는 도중에 엄마가 정신을 차렸다.
택시 기사님은 세 식구가 모두 정신을 차렸으니 '병원에 안 가도 되지 않겠냐'라고 하셨고, 아빠는 '그래도 될까요'라고 하셨다. 병원에 가면 병원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거라는... 택시기사님은 아마도 그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신혼부부가 그걸 어찌 감당할까 싶으셨겠지.
"집에 가서 김칫국 많이 마셔요."라고 하시면서 유턴을 하셨다.
조그만 집에, 방금 전에 연탄가스 만났던 그 집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내려고 보니 주머니에 든 건 단돈 5,000원 분이었다.
"만 원은 드려야 하는데 이것밖에 없어서 어떡합니까?"
"사람이 살았으니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았으니 내가 고맙지요."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 아기는 조그만 방에서 더 조그만 밤을 보냈다.
사실 택시 안에서 눈을 뜬 엄마는 반지가 없어진 본인의 손가락을 보고 더 놀랐다고 한다. 눈을 뜨자마자 반지가 없어졌다고 한 말에 택시 기사도 놀랐으리라. 그것이야말로 폐물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집에 도착해 방에서 찾은 반지는 아마도 놀란 부부를 가라앉히는 진정제의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목숨도 반지도 지켰던 나의 엄마와 아빠는 작은할아버지의 지휘 아래 그날 이후 다른 집에서 살게 되셨다고 한다. 그 후 아빠는 조선소에서도 일하셨다. 그리고 한진건설에서도 일하셨다.
한진건설에서 경찰 신보 사장 집을 지을 때였다.
"건물을 3층까지 올리고 옥상에 합판 깔자마자 그놈이 시비를 붙더라고!" 아빠는 갑자기 '그놈' 생각이 났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영천 깡패다! 너 오늘 내가 죽여버린다!"라고 덤볐던 그놈님.
"이 새끼가! 네가 영천 깡패면 나는 반월 깡패다!"라고 응수하신 아부지... 영천 깡패님은 이따시만한 톱을 들었고, 반월 깡패님은 이따시만한 통나무를 들고 서로에게 '새끼'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셨다. 아마도 각종 동물의 아기들이 많이 등장했을 것이다.
자칭 영천 깡패님이 톱을 휘둘렀고, 곧이어 자칭 반월 깡패님이 통나무를 들고 매우 빠르게 전진했다. 그랬더니 영천 깡패는 날 살리라며 톱을 내팽개치고 공사장의 임시 계단으로 후다다닥 내려갔다고 한다.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도망을 갔던 영천 깡패를 떠올리며 아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대략 예상되지만 그래도 재밌는 아빠의 무용담을 더 듣고 싶었다.
"다음날 바로 화해했지 뭐."
"아이~ 너무 시시하다. 아니 서로 깡패라고 막 허세 떨 때는 언제고 하룻밤 자고 친할 걸 왜 싸웠대?"
"내가 일을 너무 잘하니까 자기보다 일당 더 많이 받는 줄 알고 샘이 나서 그런 거지 뭐."
"우리 아빠가 일은 분명하게 하는 분이지."
"그날 내가 반장한테 보증서라고 했어. 누가 맞던지 십 원 한 장 안 물어준다고 보증 서라고 했어."
"그래서 보증 섰어?"
"뭔 보증이야. 그냥 화해한 거지."
"남자들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12개월 일하면서 일당을 11번 올려줬어."아빠의 자랑이 시작되었다.
"아빠를 파격대우해준 거네?"
"내가 한진건설 들어갈 때만 해도 건설 일은 아주 쪼금밖에 몰랐어.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까..."
"아빠가 일 잘했다고?"
"그렇지~!"
12개월 일하고 나니 대강 공사장 돌아가는 것도 보이고, 젊은 혈기에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진건설을 그만뒀다.
"아빠, 한진건설에서 나와서 집도 많이 지었겠네?"
"절도 지었지."
"절? 불교... 그 절?"
"통도사에서 정년 퇴임한 스님이 계실 절을 지었지."
"울산에서?"
"지금은 하도 변해서 잘 모르겠지만 월평에서 부산 가는 산속 어디쯤 됐지... 아마."
"산으로 출퇴근을 어떻게 했어?"
"월요일에 가면 주지스님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자고 가'하시는 거야. 그러면 절에서 주말에나 내려왔어."
"내가 아기였을 땐데? 그럼 엄마 혼자 애를 키웠어? 엄마는 그때부터 독박 육아를 시작한 거네?" 독박 육아라는 말이 없었을 때부터 시작한 엄마의 육아였다.
"미칼라. 니네 아빠가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집에 올 때 뭘 좀 사들고 오면 애들이 더 좋아할 것 같다고 했더니 '나는 돈을 벌어다 줄 테니 당신이 애들 좋아하는 거 사다 줘'라고 하는 거야."
"맞아. 아빠가 나 6학년 생일날 알람시계 사 줘서 나 엄청 좋아했었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너니까 사 준거지."
"헤헤~ ^^ 미칼라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미칼라, 너 없었으면 연탄가스 만나서 갔을지도 몰라. 아니다. 미칼라 없었으면 이렇게 살지도 않았지. 벌써 도망갔지."
"엄마는 아빠가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올 때 막 뭐라고 안 했어?"
"그때는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지.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너네들한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어."
'그때는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는 엄마의 말이 가슴에 와서 콕 박혔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엄마가 고생스러웠을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그렇게 살아 준 엄마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고맙고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