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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개월 15일

목수와 그의 아내 - 9

by 미칼라책방

대한민국의 여자가 상상할 수 있는 군생활이란 무엇일까?

각 잡고 경례하는 것?

그런데 정확하게 뭔지 잘 안 보이는 것!

그래도 우리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군생활을 듣고 상상해본다.





"자네는 주특기가 뭔가?" 사위들을 모아 놓고 질문을 하사하시는 장인님.

주특기를 묻는 아빠의 표정에는 이미 '나 자랑할 거 엄청 많음'이라고 쓰여 있다.

"저 공익인데요. 하하하!" 넉살 좋은 막내 사위가 웃으며 답한다.

"저는 비밀입니다. 아버님." 신중한 큰사위는 아버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은근히 수준을 맞추고 있다.

비밀과 공익 사이에 아빠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나는 파주에 있었네." 아빠의 선택은 사위들이 아닌 본인이었다. 이미 사위들의 주특기가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군생활 얘기 중 내가 물었다.

"아빠, 이런 얘기 막 하면 군사기밀 유출하는 거 아니야?"

"쉿! 그러니까 너만 들어."라면서 슬쩍 웃는 나의 아빠를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빠의 이야기를 주워 담았다.




논산으로 입대한 아빠는 양평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미군부대로 차출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카츄사'가 아닐까 싶다.

그곳에서 우리의 '이 상병'은 제대할 때까지 '이 상병'이었다고 한다.

"포 훈련을 잘해가지고 포상휴가를 10일이나 받았어!! "

게다가 일등병에서 상병으로 특진까지 했다니까~!

"우리 아빠 정말 쵝~! 오~!"

일병에서 상병으로 특진을 했으나 병장 T.O가 나질 않아 제대할 때까지 상병이었다는 설명에 나는

'군대는 정말 알 수 없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알 수 없는 곳에서 아빠는 한 달에 94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월급의 액수를 듣고 나는 더 혼란에 빠졌다. 9,400원도 아니고 940원이라니...

그래도 아빠는 그 월급을 모아 제대할 때 도마교리에 돼지를 사 갔다. 제대하면서 돼지까지 사 오는 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자랑스러우셨을까!

"할머니가 엄청 좋아하셨겠다. 그러고 보니까 아빠! 아빠 입대할 때 할머니 많이 우셨어?"

"사느라고 힘들었는데 그럴 새가 어딨어?"

부모님이 자녀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 입대하는 아들을 보며 눈물짓는 흔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군대 가는 아들은 줄어드는 일손과도 같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말도 못 할 만큼 아쉬워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일도 잘하고, 알뜰했던 아빠가 폭발 단추를 누를 수 있었던 그 결정적인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아빠! 그 날 별들이 28개나 있었다면서 어떻게 겨우 상병 정도가 그 중요한 단추를 누를 수 있었을까?"

"3개 중대에서 시험을 봐 가지고 딱 1명을 뽑는 거였어."

"헉! 그런데 아빠가 거기서 1등을 한 거야?"

"나는 1등 아니면 안 해!!!"

"우와~ 우리 아빠 진짜 대단하시다~~~"

"그 날 입은 옷을 분대장이 신발까지 싹 다 벗겨 갔어."

"중요한 날이라고 새 거 입으셨구나."

"말도 마~ 가기 전부터 '너 다녀오면 신발하고 옷 좀 나 주라. 꼭 줘야 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정말 다 벗어 줬어?"

"하도 쫓아다니면서 달라고 해서 다 줬지."

아빠는 군대 얘기를 정말 좋아하셨다. 에피소드가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물고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생각났는데~!" 라면서 군생활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아빠를 보니 그때가 정말 행복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논 아니면 밭'이었을 아빠의 시간을 군생활이 화려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남들은 군대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꾼다고 하지만 우리 아빠는 그 생활이 참 좋았다고 한다.

"아빠. 남들은 입대하는 악몽 꾼다는데 아빠도 그래?"

"미칼라! 아빠는 군대 생활이 너무 좋았어. 다시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빠의 리즈 시절은 '이 상병' 때였을 것이다. 이 상병이 휴가를 나오면 구파발 검문소를 먼저 거친다. 이상병이 헌병에게 휴가증을 내밀면 헌병은 휴가 가는 게 맞는지 서류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아 글쎄~~! 헌병이 막 당황하면서 나한테 경례를 올려 부치는 거야!!! "

"왜?"

"휴가증이 죄다 영어로 쓰여 있었거든! 하! 하! 하!"

그 헌병은 무슨 일인지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스모로 군복을 입은 이 군인을 그냥 빨리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스모로 원단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빠의 말에 의하면 굉장히 좋은, 미군만 입을 수 있는 고급이라고 했다. 내가 모르니 믿을 수밖에... 또 아빠는 제대하고 2년 동안 해외에 나가질 못했다고 혀를 끌끌 찼다.

"아빠. 그 시절에 해외가 웬 말이야? 제주도도 못 갔을 텐데?"

"돈 없어서 못 갔다고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 하하. 자네들은 어떤가?" 아빠는 은근슬쩍 사위들에게 본인이 군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자랑하고 싶으셨다.

"아버님, 저도 비밀취급 자격 2급입니다."라는 큰사위의 말에 아빠는 큰 눈을 더 크게 뜨셨다.

"자네도 전역증에 빨간 표시 있어?"

"네. 집에 전역증 있는데 있다가 보여드릴까요?"

"아.... 나는 없어졌는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통에 그 전역증이란 물건을 내가 색종이로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한숨을 쉬느라 숙여진 고개를 들면서 아빠는 에피소드를 하나 더 기억해내셨다.

"내가 전기 배우고 군대를 갔으니 뭐가 고장만 나면 나를 부르는 거야. 어느 날은 대위님이 모자에 계급장이 떨어졌다고 나한테 가져오더라고. 그래서 납땜을 했지. 하고 나서 보니까 잘 붙었는지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요렇게 쓰고 거울을 봤지. 근데 뒤에서 누가 '어이~ 이대위!' 하길래 돌아봤더니 대위님이 어느새 거기 서 있는 거야~!!!"

그렇게 이상병은 잠깐이지만 이대위가 되기도 했었다.




확실히 아빠는 35개월 15일의 군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군대 얘기만 나오면 눈빛과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남들은 그 힘들다던 군생활이 아빠에게는 오히려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다. 그만큼 생활이 고단하고 힘들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 한 켠이 찡하고 울렸다. 사위들과 둘러앉아 군대 얘기를 하며면서 아빠가 부디 오늘 저녁 행복을 하나 더 쌓으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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