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와 그의 아내 - 8
우리 엄마는 늘 아빠의 존재에 대해 강조하셨다.
"엄마는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니네 할아버지가 친정 아부지 같았어. 결혼하고 그게 참 좋았어."
나도 할아버지가 참 좋았다. 할아버지가 계신 도마교리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어렸을 때 살았던 기억도 기억이지만, 무엇보다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각별했다.
멀리 울산서 시집 온 며느리가 진통을 한다고 할머니는 벌써부터 호들갑이셨다.
병원을 가야 하나...
아니다. 가다가 애를 낳아버릴 것 같다.
이 늦은 시간에 산길을 지나 병원까지 가는 것이 영 마뜩잖다.
그러니 우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아들은 의사를 불러오라고 보냈다.
며느리는 진통을 하고 있다.
시아버지는 대문 밖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아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만 보고 있다.
며느리는 진통을 하고 있다.
시동생과 시누이들은 처음 있는 이 상황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나의 탯줄은 할머니가 잘라주셨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고, 세례명은 신부님이 지어주셨다.
나의 세례명은 '미카엘라'다.
내가 태어난 후 도마교리 식구들은 본인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하나씩 붙이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미카엘라 엄마', 우리 아빠는 '미카엘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집은 '미칼라네 집'이 되었다.
'미칼라네 집 며느리'는 분가 후에도 수시로 본가에 들어와서 어른들 진지 챙기는 착한 며느리였다.
결혼 전 퇴근길에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진짜 그냥.
그래서 깜빡이를 켜고 도마교리로 차를 몰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기척이 없었다.
"할아버지~! 나 왔는데~ 어디 계셔?"
"미칼라 왔냐?"
안방에서 나를 맞으시는 할아버지의 이마에 상처가 보였다.
"할아버지 이거 뭐야? 어디서 다치셨어? 병원은?"
"마당에서 그냥 살짝 넘어졌어. 어지러웠어. 인제 괜찮아."
"아이고~ 조심하시지~! 할머니는 어디 가셨나 봐? 저녁은 드셨어? 차릴까요?"
"응. 배고프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나는 도마교리 흙집에서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저녁상을 치우고 사과를 반만 깎아 드렸다.
"나머지도 다오."
"할아버지~ 이거 다 드시면 배 아프실 것 같아. 할머니 오시면 같이 드셔. 알았죠?"
"그래."
"그럼 나 갈게요. 또 오께~"
"조심히 가. 운전 조심하고."
"나오지 마셔."
이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다녀간 며칠 후 엄마가 점심에 도마교리에 들러서 진지를 차려드렸다.
그날 저녁에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돌아가셨다.
미칼라 신랑도 못 보구 돌아가셨다.
안성 추모공원에 모신 후 일주일쯤 지나서 꿈에 할아버지가 오셨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나를 부르셨다.
"미칼라~"
"할아버지!"
"미칼라~"
"할아버지~ 가지 마~ 응?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오열을 하며 할아버지에게 가지 말라고... 가시지 말라고 매달렸다.
"잘 있어라."
할아버지는 잘 있으라는 딱 한마디를 하러 오셨을까?
하얀 두루마기 자락이 할아버지 걸음마다 조금씩 나부꼈다. 흰 옷자락을 부여잡고 싶었지만 벌써 멀리 가셨다. 내 울음소리가 안 들리시나?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그래서 더 크게 울고, 더 목청껏 할아버지를 불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구름처럼 홀연히 가셨다. 그리고 다시는 안 오셨다.
내가 저녁을 차려 드리던 날 할아버지의 이마에 난 상처, 그 어지러움은 아마도 뇌졸중의 초기 증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할아버지께 사과를 반 개만 드렸다.
나머지도 달라하셨는데 그걸 못 드렸다.
꿈에 오셨을 때라도 드릴걸.
할머니 할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다.
엄마가 할아버지 마지막 진지 차려드린 얘기를 할 때면 나는 사과 반쪽 얘기를 하며 할아버지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