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덕분에 이해합니다
나는 2남 1녀의 엄마이다. 아이들 얘기야 책을 몇 권 써도 될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특히 가운데 아들은 많은 챕터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내향형 엄마 밑에서 크는 엔프피 아들의 괴로움? 글쎄.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우선 내 말부터 먼저 들어보세요...
둘째의 태명은 '보석'이었다. 남편이 나에게 커다란 + 보라색 + 반짝이는 + 보석이 + 알알이 박힌 머리핀을 선물하는 태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액세서리를 받았으니 필시 딸이라고 생각했지만 열 달 후 예쁜 아들을 낳았다. 신생아실에서 쌍꺼풀이 있는 아기가 태어났다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아기가 눈만 뜨면 모두가 우와~ 감탄을 했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진한 쌍꺼풀이 매력적이었다.
이 매력은 말썽을 부리고 난 후 엄마의 마음을 홀리기에는 부족했던 것일까. 활발하고 사교적인 이 아이를 키우기에 내 에너지가 부족했던 것일까. 친정 엄마는 예전 같았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요즘 엄마들이 예민해서 그렇다지만 어쨌든 말썽은 말썽이었고 소동은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엄마는 또 속 썩으며 키운 아들이 나중에 효도한다며 좋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그 시절이 과연 올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오히려 하루하루 조용히 넘어가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일 줄이야.
아이가 누린 자유가 나에게는 혼돈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였다. 당장에 생각나는 것만 소개하자면...
서울우유 1L 들이를 거꾸로 들고 뛰어다니다가 엄마에게 혼이 나 풀이 죽은 채 방으로 들어갔던 아이가 색칠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라고 한 뒤 거실 바닥의 우유를 닦고 있는데 이 녀석이 씨익 웃으며 다가왔다. 온몸에 유성 매직으로 낙서를 한 채 말이다. 하얀 도화지는 방에 그대로 있었다. 휴...
공개수업을 하는 교실에서 모든 아이들이 칠판을 쳐다보고 있을 때 한 아이만 뒤를 쳐다보고 앉았다. 내 아들이다. 엄마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선생님이 아무리 불러도 오직 엄마뿐이었다. 어서 앞을 보라고 팔을 저었더니 자기도 안녕이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휴...
소방서 불 끄기 체험을 위해 마련된 물뿌리개 호스를 불 모형이 아닌 친구들을 향해 뿌리고 까르르 웃었다. 순간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태권도 학원에 간 첫날 날쌔게 뛰어다니다가 엄지손가락이 골절되었다. 관장님과 나는 반갑다는 인사 뒤 바로 사고를 처리하느라 서로 죄송하다고 했다. 내가 더 죄송했던 마음은 여전하다. 휴...
학교가 끝난 후 너무나 신난 마음에 실내화 가방을 뱅뱅 돌렸는데 가방 안에 있어야 할 실내화가 밖으로 날아가 친구 가슴을 때렸다. 하얀 티셔츠에 물결무늬 신발 바닥이 명확하게 찍혔다. 실내화 하니까 생각나는데 나이키 실내화를 사줬더니 바로 잃어버렸다. 왼발만. 신발 앞축 찢어먹는 건 일도 아닌 아들이었다. 심지어 책가방이 없어졌다며 야밤에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진 일도 있었다. 책가방은 교실에 그대로 있었다. 종례 후 몸만 튀어나온 것이었다. 휴...
잇티제 엄마는 체계적이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엔프피 아들은 즐거움을 추구하며 넘치는 호기심으로 친구들을 이끄는 에너자이져다. 뒤처리에 무관심한 아들에게 당부에 당부를 더해 매일 아침 등교인사를 했다. 틀에 박힌 일상생활에서 안정을 느끼는 엄마와 달리 이 아들은 순간의 느낌대로 튀어나가는 탱탱볼 같은 인생을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모자지간에 큰 싸움 없이 나름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운동 덕분이다. 초등학교 내내 육상 선수였던 아들은 달리기와 관련된 운동을 대부분 좋아한다. 나도 달리기를 기본으로 운동 루틴을 만드는 편이라 아들과 요즘은 어떤 운동을 하는지 물으면서 대화의 물꼬를 튼다. 달리기라는 공통점이 있어 다행이다. 물론 아들이 보기에 내 달리기는 지루한 편이고, 내가 보기에 아들의 달리기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하여 부담스럽다. 참 다르지만 그래도 이해의 출발점은 마련되었다. 활동적인 내향인 엄마는 엔프피 아들 덕분에 이해의 너비와 깊이를 더해가는 중이다.
제발 오늘도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