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_ 01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여러 해 동안 간다 간다 말만 하고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고등학생이라, 대학 입시가 있어서, 고등학교 입시도 있었고, 일이 바빠서 등이었다. 코로나 이후로 다섯이 함께 움직인 기억이 없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다섯 식구가 여행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 같아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모두에게 통보했다.
아이 셋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성인 자녀 둘에 막내는 고등학생이어서 얘네들 일정 맞추는 것만도 만만치 않았다. 큰아이는 연습과 공연으로 확답을 주지 않았고, 둘째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슬쩍 뒤로 빠지는 모양이었고, 막내는 방학이지만 매일 등교를 해야 하니 가네 마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과 나의 일정은 이번 여행에서 제일 후순위로 밀리는 듯했다.
따로 출발해서 제주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티켓팅 직전에 일정이 변경되어 다섯이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다만 김포공항까지 가는 길이 각각이었다. 큰아이는 연습실에서, 남편은 회사에서, 막내는 학교에서, 둘째와 나는 집에서 공항까지 가는 동선이었지만 우리가 한 비행기를 타는 게 어디냐며 현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졌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늘 그렇다. 출발까지가 너무나 어렵고 힘든 도전이다. 일단 출발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번 제주 가족 여행은 특히 출발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여행 날짜가 늦게 정해지는 바람에 비행기 요금도 되게 비쌌다. 눈 딱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때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족 모으기 캠페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섯 명을 공항으로 끌어모으기는 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공항에 인산인해였다. 이날은 바로 12월 31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병오년(丙午年) 1월 1일 일출을 보기 위해 제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새해를 색다른 곳에서 맞이하고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색다른 곳을 생각했다고 하지만 검색대에 몰린 사람들을 보니 전혀 색다르지 않았다. 너도나도 떠나겠다고 모인 공항에서 끝없이 이어진 줄을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원래 출발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자위했다.
슬금슬금 움직이며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파란 바구니에 가방을 넣고, 다음 바구니에 외투를 벗어 넣었다. 엑스레이만 통과하면 끝이다. 거의 다 왔다. 바로 저 너머에 비행기가 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런지 여자들은 검색봉을 그냥 통과하도록 했다. 휴, 드디어 넘어왔다. 막내와 나는 통과, 이제 남자 셋만 나오면 된다.
삐... 삐...
검색대 보안요원들이 엑스레이에 뭐가 보인다며 가방을 재검사한다고 뒤로 다시 넘겼다. 어? 가방이 익숙하다? 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큰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한 저 눈빛,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민성아, 가방에 뭐 있어?"
"어. 그런 것 같아."
"뭔데?"
"톱."
"톱? 설겅설겅 그 톱?"
"어."
"가방에 톱이 왜 있어?"
"가야금 손볼 때 필요해."
"아이쿠. 톱이 웬 말이니, 톱이."
"근데 엄마..."
"어? 왜? 뭐가 또 있어?"
"드라이버랑 칼도 있어."
"너 철물점 털었니?"
"허허."
"허? 허? 지금 웃음이 나와?"
큰아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속이 너털너털 털리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예전에 상해 갈 때도 가위랑 송곳을 챙겼던 이력이 있다. 가져가지 말랬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챙겼다며 검색대에서 다 뺏겼던 걸 기억하면서도 이번에도 똑같이 아니 특별하게 톱까지 더한 상황이었다. 보안 요원이 가방을 함께 열자며 옆으로 데려갔다. 나도 따라가서 보니 톱이랑, 드라이버 두 세트랑, 커터갈과 가위가 나왔다.
"얘가 가야금 전공자라서 그래요. 그건 연주자가 직접 손봐야 하거든요. 호호. 별 걸 다 가지고 다니네요. 호호."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이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었다. 겸연쩍은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안 요원은 수화물로 부치거나 여기서 처리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다시 수화물 부치러 나갔다가 인산인해를 뚫고 재입장하라고? 아이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실까. 우리는 그냥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보안 요원한테 알아서 해달라고 말하고 돌아서며 큰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손에 익은 연장을 잃어 속상해할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것 같았다. 다시 사면된다고 하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검색대에서 요란을 떨고 난 후라 그런지 떠나려는 게 아니라 도착하는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카페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알아서 어디든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으로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뜨거운 커피에 정수기 물을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뒤 벌컥벌컥 마셨다. 휴... 이제 출발하는 건가?
비행기 좌석에 앉기까지는 힘들었지만 이륙은 순조로웠다. 이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는 제주에 도착해서 알았다. 우리가 출발하는 그 시각에 다른 항공사 비행기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뉴스에 의하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제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대부분 연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단다. 비록 우리는 티켓팅이 어려웠지만, 줄이 되게 길었지만, 보안 요원에게 철물점이 아니라고 떠들어댔지만 안전하게 출발했다. 제일 어려운 '안전 출발'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