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 5
* 11월 18일 독서토론
* 이탈리아를 읽고 괜히 멋들어서... 카푸치노 주문. ㅋ
* 1번부터 6번까지 시리즈 중 5번까지 모두 읽었는데 회원님들이 추천해 주신 5번이 제일 재미있음, 6번은 혼자 몰래 읽을 예정. ㅋ
244쪽 봤어? 각자 어디에 투표했을지 너무 궁금하다!!
청동문 출품작 중 1번과 2번,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지 투표를 했다. 우리는 모두 2번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당시 피렌체는 1번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예술적 감각이 달리는 건지, 경제적 센스가 부족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보고 또 봐도 2번이 더 당장 아들의 목을 베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천사가 만류하는 손길도 어찌나 급박해 보이는지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1번은 기베르티가, 2번은 브루넬리스키가 각각 출품한 것이다. 당장에는 기베르티가 선정되었지만 두오모 성당의 돔을 브루넬리스키가 올린 세월까지 더해보면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이 두 예술가가 전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도시를 우뚝 세우는 두 건물이 600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 위에 '옛 것을 지키는' 피렌체의 정신을 본받고 싶다. 그러고 보니 우리와 피렌체는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종교적 신념에 매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몽골의 칩임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피렌체는 밀라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두오모 세례당의 청동문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에는 막시스트가 되고, 50대에는 인문학자가 되는 걸 보면 인류의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 같아.
50대나 되어야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을 더듬고 그 비결을 하나씩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기도 전에 우리는 생을 마감한다. 설령 알리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피 끓는 청춘에게 통할 리 만무하다. 끓던 피가 가라앉을 무렵 '아... 그때 그 말이 이거였구나...'라는 깨달음의 순간이 오지만 이 역시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인류의 배움이 배움으로 겨우겨우 이어지며 천천히 발전하는 것이라는 회원님의 말씀에 끄덕끄덕.
이탈리아에는 1300년대에 천재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우리는 이런 뛰어난 천재들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발견을 하지 못한 걸까?
번뜩 생각난 인물은 장영실이었다. 있었다. 그 말고도 함께 연구한 동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천재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뒷배가 반드시 짝꿍으로 함께 존재해야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영실은 '세종'이라는 뒷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후반을 '알 수 없음'으로 마무리하는 건 더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때가 있고, 운대가 맞아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을 이럴 때 써먹어야 하나보다.
1300년대의 피렌체나 밀라노, 베네치아 이런 도시를 보면 역시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성공했어.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는 그걸 깨달으면서도 이렇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웃기지 않아?
그렇다고 우리가 돈이 싫은 건 아니다. 단지 돈보다 글이 더 좋을 뿐이다. 돈도 많고 글도 많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무리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그래서 우리는 내일도 오늘처럼 글을 읽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비약적 발전을 보인 단계를 살펴보면 생산력이 유한계급을 생성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노동을 하는 사람과 노동을 지시하는 부류로 나뉘고 이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얻은 계급은 문화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재능이 있고 한가한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 인생의 쓴 경험이 많은 수록 더 아름다운 예술로 나타나는 걸까?
인간의 바닥을 마주하는 경험이 마냥 아름답고 좋았던 경험보다는 대중의 마음을 휩쓸기는 더 좋을 것이다. 고생을 함께 한 사람에게 더 진득한 감정이 생기는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처절한 본성을 겪은 사람이 죄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피렌체와 밀라노, 베네치아,,, 이런 도시들과 이 책에서 사용하는 중세의 특징을 나타내는 어휘들이 너무 낯설었어. 이 책은 유럽이나 이탈리아에 대한 배경지식에 따라 이해와 감동의 정도가 달라질 것 같아.
아마도 중세 유렵은 종교를 떠나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삭(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아버지)에 대한 성경을 처음 접한다면 청동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폐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맥락적 학문이다. 앞과 뒤에 무슨 일이 있는지 연관 지어 바라보아야만 온전한 의미를 볼 수 있다.
삼천포로 빠지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맥락적 이해를 하기 위한 역사 공부를 찬성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지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물리적 시간은 40년이 채 안 되지만 우리의 400년을 앗아간 것 같은 상처로 기억된다. 그 또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이어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명확하게 알았으면 좋겠다.
삼천포로 너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