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수와 그의 아내 - 23
선생님. 우리 애는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데면 다 좋습니다.
내가 고3 때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러 온 엄마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교무실 한편에 마련된 입시상담 책상에 담임선생님과 엄마가 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적합한 과라며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고, 엄마는 깨알 같은 글씨를 한 번 쓰윽 보고는 선생님에게 여기가 어느 대학이냐고 물었다. 엄마의 기준은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세 곳은 엄마의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 곳으로써 통학거리가 모두 한 시간 안팎인 학교들이었다. 접수를 비롯한 입시의 과정들이 진행된 후 차례로 발표가 났고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아빠에게 내가 물었다.
"아빠~! 아빠는 내가 대학교 붙어서 좋았어?"
"일하다 말고 집에 갈 만큼 좋았지!"
"그랬나?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친구들한테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미칼라가 대학을 세 군데나 붙었다고!"
아빠는 배움에 맺힌 한을 나를 통해서 푸셨다. 공부한다고 하면 '어여 들어가라'시며 동생들을 조용히 시키셨다. 수능 D-day 카운트를 시작하고 우리 집은 모든 것이 내 위주로 진행되었다. 막냇동생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목소리가 높아진다.
"언니가 공부한다고 하면 우리는 숨도 못 쉬었잖아!"
"네가 워낙 시끄러웠으니까 그랬겠지!"
"언니 기분 안 좋으면 우리는 꼼짝도 못 했다니까!"
"모른대이~ 나는 모른대이~ 하나도 기억이 안난대이~"
"난대이~ 나는 다 기억난대이~이~!!"
기억이 안 난다고 동생이랑 말장난을 했지만 사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언니' 또는 '누나'가 가진 영향력을 알고 있었다. 옆에서 모르는 척 듣고만 있던 엄마가 드디어 한마디를 했다.
"너 아무리 그래도 너는 언니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
"알지~ 그것도 알지~"
엄마도 아빠도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나 기뻤다고 하셨다. 아빠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좋으시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생들이 대학 원서를 쓸 때 "언니" 또는 "누나"인 나는 부모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엄마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씀하셨다.
미칼라~ 동생들도 집에서 다닐 수 있는 학교면 좋겠어.
이십여 년 전 우리 엄마의 대학 선택 조건은 일관되게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그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기 위해 우리 가족은 많은 고민을 했다. 엄마의 그 까다로운 조건 덕분에 우리는 '그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들과 조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진로나 학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아들도 조카도 전공에 대한 고민이 확실하지만 우리가 전공한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자고 나면 바뀌는 입시 제도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어쩌면 엄마, 아빠의 일관된 기준이 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